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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가 Aug 16. 2024

고양이버스

이웃집 토토로



5

엄마.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려요.

신기한 일들로 즐거운 하루였어요.

/ 영화 [이웃집 토토로] _ 사츠키






회기역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고양이버스를 떠올렸다. 영화 [이웃집 토토로]에서 사츠키를 엄마에게 데려다준 그 고양이버스를 _


지하철은 영화만큼이나 빠르게 데려다주지도, 그렇다고 즐겁게 해주지도 않아서 나는 회기역으로 향하는 그 지하철이 무척이나 싫었다. 사츠키와 메이처럼 웃으며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싫었다. 그래. 더 이상의 표현은 없을 것 같다. 싫었다.


엄마는 일생 마지막 항암치료를 회기역 경희의료원에서 받기로 했다. 엄마는 바다 건너 제주에 있었지만 그래도 아픈 몸을 이끌고 서울로 오겠다 했다. 다리가 불편한 엄마의 서울 상경기는 일인분으로 끝나지 않았다. 항상 함께 할 동행이 필요했고 매일매일 함께하지 못했던 나는 그 동행을 구하느라 많은 사람들에게 연락을 해야만 했다. 방 한구석에 던져두던 스마트폰은 곁에 없음 불안한 존재가 되어갔고 평소 연락이 드물었던 친척들은 계속해서 전화를 걸어왔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엄마에게 좋은 여동생들이 있었다는 것. 그 여동생들이 없었다면, 그중에서도 셋째인 정은 이모가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이 모든 걸 견뎌왔을까 싶다.


하루는 정은 이모가 새벽 늦게 연락이 왔다. 젊은 시절 엄마와 함께 술 장사를 하던 이모는 아직 여력이 남아 여전히 술을 마시며 일을 했고 술기운을 빌어 마음에 꾹 눌러둔 사연을 전하려 연락을 했다. 무척 슬펐다. 슬펐다는 것 말고는 더 이상의 표현은 없을 것 같다. 슬펐다. 곧 100세를 바라보는 외할머니를 모시는 것도, 그리고 아픈 엄마의 병간호를 하는 것도, 어쩌면 거의 모두가 이모의 몫이었다. 그토록 힘든 삶을 술에 의지하며 버티고 버티던 이모는 그 새벽에 나에게 전화해 이렇게 말했다.

"훈아. 전화할 때가 없더라. 이모가 남자친구라도 있었음 거기 전화해 울 텐데 아무 데도 전화할 때가 없더라. "

울었다. 이모가 모르게 통화 중에는 꾹 참았던 눈물을 새벽에 모두 쏟아냈다. 눈물이 남아있지 않도록 모두 쏟아냈다. 어쩌면 나는 그날, 엄마의 암 투병 소식을 들은 그날보다 더 많은 눈물을 쏟아냈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이모는 나에게 고마움이자 슬픔이었다. 축축하게 젖어있는 이모의 그 목소리에 비치던 설움, 아픔,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저,

"이모. 나한테 전화하면 되지. 앞으로는 나한테 전화해."

나한테. 나한테. 그것뿐이었다. 일목요연하게 그 설움을 어떻게 달래줄지, 아픔을 어떻게 치료해 줄지, 고통을 어떻게 지워줄지는 말하지 못한 채 그저 나한테 전화하라는 게 다였다. 왜 나는 이 나이 먹도록 누구 하나 책임지고 지켜주지 못하는 존재로 성장한 것일까. 성장하긴 했나. 그냥 어린 시절 그대로 힘겹다며 응석이나 부리고 있는 건 아닌가. 내가 어른이 되면 꼭 지켜주고 싶다던 엄마도, 이모도, 그 누구도 지켜주지 못하고 있는 난 정말 어른인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에 나는 점점 부서지고 흩어지고 그랬다. 그래도 기운을 내보겠다며 잠들지 못하는 새벽에 영화 [이웃집 토토로]를 틀었다. 나는 이모에게 토토로가 되어주고 싶었나 보다. 고양이버스가 되어 이모를 태워주고 싶었나 보다. 힘들고 슬픈 이모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고 싶었나 보다.

아픈 엄마의 병문안을 가는 사츠키와 메이, 그리고 아빠. 아빠는 엄마를 웃게 하고 사츠키는 메이를 지킨다. 그런 가족의 사각관계는 얼마나 행복할까. 보면서 생각했다. 동생이 없어 다행이란 생각도 여러 번 들더라. 엄마는 가끔 나에게 동생 하나 안겨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린다지만 나는 혼자가 좋다. 혼자 감당하는 삶이 나에게는 익숙하다. 메이의 어리광을 모두 받아주는 사츠키를 보고 있으면 우리 엄마의 선택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몇 번이고 얘기해 주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사츠키와 메이에게서 엄마와 이모가 보이기도 했다. 첫째라지만 애교가 많던 엄마는 동생 메이이고 셋째라지만 성숙했던 이모는 언니 사츠키고. 그럼 난 그 둘을 지켜주는 토토로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그래도 역시 내가 사츠키가 되어야 한다. 영화에서 그 누구보다 성숙하고 어른스러운 사츠키가.


한동안은 영화 [이웃집 토토로]를 보면 그토록 힘겹게 오가던 회기역의 지하철이 떠오를 테지. 그래도 다행인 건 그때 함께해 준 이모가 있기에. 그리고 나를 위해 암을 견뎌준 엄마가 있기에. 사츠키의 엄마는 딸들을 위해, 그리고 당신의 남편을 위해 어서 빨리 나아 집으로 돌아가겠다 했다. 우리 엄마는 나를 위해, 그리고 당신의 남편을 위해 그리고 또 이모를 위해 병원에서 집으로, 다시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가겠다 했다. 그러니 나는 그때마다 사츠키처럼 엄마에게 즐겁고 씩씩하게 좋은 이야기를 가득 들려주겠다 했는데 자주 그러질 못했다. 추운 겨울 엄마를 집에 바래다 주던 어느 날 택시에서 한 이야기만 자꾸 맴돈다.  

엄마. 곧 봄이야. 엄마가 좋아하는 봄. 

그럼 내가 엄마가 좋아하는 예쁜 꽃을 따다 선물할게.

그러니 집에 있어. 엄마. 이모와 함께 집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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