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웨이, 초원을 지나..

Day 2 론세스바예스-수비리 20.5km

by ㅇㅁ

어제 가장 큰 관문이었던 피레네 산맥을 넘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힘들기도 했지만 생각보다 걸을 만했던 첫날의 경험으로 자신감이 생겼고, 오늘은 또 어떤 풍경을 마주할지 무척 기대가 되었다. 어제 27km를 걸었는데 오늘도 20km 넘게 걷는다니.. 보통 등산하고 다음날은 근육통으로 잘 못 걷는데 서울에서 약간이라도 걷기 연습을 해서일까 다리가 많이 아프진 않았다.


아침 여섯 시가 넘어서 셋이 같이 출발 준비를 하는데, 옆에 선글라스를 쓴 배우같이 생긴 외국인이 자기는 오늘 팜플로나 까지 간다고 한다. 팜플로나까지 가려면 40km는 걸어야 하는데, 보통 이틀 만에 걷는 거리이다. 그는 21일 만에 산티아고를 다 걷는다고 했다. 남자애들은 자극을 받는 모양인지 어제 걸을만했는지 자기들도 오늘 팜플로나까지 한 번 가볼까 하는 눈치였다.


어디서 묵을지 정하는 것은 걷는 사람 마음인데 보통 하루 일정은 20~30km 내외로 걷는다. 순례자의 사무실에서 순례자 여권을 발급받을 때 추천 일정과 지형 및 알베르게 정보에 관련된 종이를 나눠주는데 무척 유용했다. 참고해서 걸으면 된다. 가끔 정말 잘 걷는 사람들이나 뒤로 갈수록 체력이 적응되고 탄력이 생긴 사람들은 하루 40km 넘게 걷기도 한다. 두 친구들은 풀코스를 걷는 것이고, 일정이 나보다 빠듯하게 계획되어 있어 조금이라도 더 많이 걷고 싶어 했다. 그래도 아직은 초반이라 무리되지 않게 일단 걷는 거 봐서 정하자며 출발했다.


출발할 땐 구름이 많이 끼어 비가 한 두 방울 떨어지는 날씨였다. 어둑한 새벽녘 약간 어두컴컴한 숲길을 지나는데 혼자였으면 좀 무서웠을것 같다. 두 친구의 걸음이 상당히 빨라서 뒤처지지 않으려고 경보하듯이 걸었다. 조금씩 날이 밝아지고, 날씨도 맑아졌다. 상쾌하고 기분 좋은 날씨. 깔끔하고 아기자기한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의 정취에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마을을 지나는데 어디선가 들리는 음악소리.. 앞에 좀 나이가 있어 보이시는 외국인 할아버지가. 마이웨이를 틀어놓고 걸으셨다. 하얀 수염에 붉은 나시티와 반바지, 네모진 가방에 스틱을 꼽은 모습이 라디오 인간 같기도 하고 영화 속 캐릭터 같은 모습이었다. 마이웨이라니.. 흘러가는 세월의 낭만이다.. 감상에 젖어 할아버지가 틀어놓으신 음악이 들리는 반경 안에서 걸으려고 노력했다.



걷다 보니. 초원과 산이 펼쳐졌다. 초원 위로 아직 안개가 걷히지 않은. 들판 길이 나왔다. 소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아침 해가 떠오르며 햇살이 들판을 비출 때.. 안개가 걷혀가는 초원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연보랏빛 이름을 알 수 없는 꽃인지 들풀인지가 덮혀 있는 분홍빛 들판도 펼쳐졌다. 감탄하며 무언가 를 찍으려 했지만 역시 사진으로 담긴 힘들었다... 오늘은 이 구간의 순간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길 잘 했다고 계속 생각했다. 중간중간 bar가 있어 순례자의 여권에 세요(도장)도 찍고, 음료 마시며 쉬기도 하고, 외국인들과 가벼운 인사들도 하면서 걷고 걸었다.

어제는 산을 오르고 거리도 더 멀었는데 오늘은 내려가는 길이고 20km정도 되니 심적인 부담이 적었다. 그래도 중간에 울퉁 불퉁 돌길을 내려가느라 발이 상당히 아팠고 배낭때문에 어깨도 계속 아팠다. J는 벌써 발에 물집이 잡혀서 조금 불편해했다. 물집이 잡히기 시작하면 걷는 것은 더 어려워진다.. 나는 다행히 순례길을 걸으면서 물집은 한 번도 잡히지 않았다. 정말 감사한 일중 하나다. 발가락 양말도 필수품이었는데 없어도 되는 발이었다니..놀랍다.



7월 중순이었는데, 열 시 전까지는 그래도 걸을만하다. 그 이후부턴 더워지기 시작하는데 열두 시 정도쯤 되면 거의 땀에 흠뻑 젖으며 걷게 된다. 초반의 피레네 구간 부근은 산 지형이라 심하게 덥진 않았지만 여름 까미노는 두 시 이후에는 걷지 않는 것이 좋다. 한 여름 스페인 태양의 강렬함.. 시에스타가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뜨거운 햇빛만 없다면 습하지 않아 그늘은 시원했다.


열두 시가 넘어서 수비리 마을에 도착했다. 강가 옆에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여기서 많이들 하루 묵는 것 같다. 두 친구는 더 걷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같이 더 걸을지가 고민이 되었다. 난 내일 팜플로나까지 갈 생각이니까.. 굳이 더 멀리 갈 필요도 없었기에.. 일단 점심에 식당에서 순례자의 메뉴를 먹으면서 상황을 좀 보다가 결국 나는 남고, 그들은 떠났다. 그들은 한시간 정도 더 걸어 다음 마을에서 쉬었다고 한다. 인연이라면 또 만나겠거니 했는데.. 다시 만날 순 없었다.


수비리에 있는 리오 알베르게에서 묵게 되었다. 가격이 조금 있는 편이긴 했는데 숙소가 깔끔했다. 방은 4인실로 독일인 남자 한 분과 나와 어떤 국적인지 모르는 아주머니 두 분이 함께 썼다.

내 침대는 2층이었는데, 마을 강가와 전경이 바라보는 풍경이 너무 좋았다. 오늘따라 바람이 많이 불어서 무척 쾌적했다. 이제 또 다시 혼자가 되니 조금 쓸쓸해졌다. 같이 갈걸 그랬나 하는 후회도 밀려왔다. 그러나 비우면 새로 채워지는 법인 듯 그 이후에도 여러 인연들을 만났다.


zubiri의 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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