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플로나에서..

Day 3 수비리-팜플로나 20km

by ㅇㅁ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이른 시각에 출발을 준비했다. 혹시 좀 빨리 걸으면 먼저 간 친구들과 마주칠 수도 있을까 싶기도 했고.. 혼자서도 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숙소에서 멀뚱하게 시간을 보내고 나니. 동행자들이 그리웠다. 함께 같이 뭔가를 하지 않아도 근처에 있다는 사실에 안심이 되었던 듯.. 아직 어두운 새벽 홀로 짐을 부랴부랴 싸서 나왔다.


맞게 가고 있군.


흐릿했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해가 뜨면 더우니 이런 날씨가 걷기엔 더 좋다. 목초지를 지나 마을들을 지나고 있었다. 약간 울적해진 마음이었지만 길을 걸으니 또 기분이 좋아진다. 다른 욕심 없이 길을 마주하기 위해 온 여행이었다. 그게 무엇보다 좋았다. 길을 걷는 것 외에 아무런 욕심을 가지지 않아도 되는 것. 걷는 것에만 집중하면 되는 것. 순간들을 기억하고 싶어 연신 사진을 찍었지만.. 그마저도 안 해볼까 싶었다.



들판을 지나 오르락내리락 걸으며 여러 외국인들과 안부 인사를 했다. "올라~ 부엔 까미노~" "부엔 까미노~^^" 첨엔 어색했지만 이젠 점점 내 입에 붙고, 아주 당연한 듯 인사하게 되었다. 여러 순례자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다가 강가의 다리가 있는 작은 마을을 지나 어느 순간 도시의 느낌이 슬슬 풍기기 시작했다. 그동안 산과 논 밭만 보다가 도시가 나오니 낯설기도 했고, 살짝 무섭기도 하고 기대도 되었다.



팜플로나는 순례길에서 마주한 첫 소도시이다. 이동을 팜플로나로 해서 순례를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다. 요새처럼 성벽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 멋스럽다. 열두 시가 좀 못된 시간 jesus y maria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세 번째로 일찍 도착한 거 같다. 아직 문을 열지 않아 문 앞에서 기다렸다. 보통 열두 시 이후에 문을 연다. 낮에 순례길을 걸으며 인사했던 덴마크 청년을 다시 만났다. 한국인을 좋아한다고 매우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이라며 호의적으로 인사했다. 대부분 걷다 만나고, 숙소에서 다시 만나고, 그러면서 친구가 된다. 친해지지 않아도 오래 걷다 보면 순례자의 길을 걷는 비슷한 일정의 사람들끼리 어느 정도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다. 마치 같은 반 혹은 같은 학교를 다니며 알게 되는 사람들처럼.



공립 알베르게는 가격도 싸고 괜찮았다. 꽤 많은 인원을 수용했다. 체육관 느낌이긴 한데 나쁘지 않았다. 칸막이로 구분되어있고 이 층 침대가 주르륵 놓여있어 화장실까지 가려면 꽤 많은 침대들을 지나쳐야 했다. 샤워실까지 공용인 건 살짝 충격이었다. 변기도 뚜껑 없는 남자용 변기. 하하.. 그래도 깔끔하고, 여럿이 이용하기 편리하게 되어있었다. 개인 콘센트도 있고..ㅎㅎ 매일 밤 다른 곳에서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잔다는게 상상이 잘 안됐고, 두려웠는데.. 잘 적응하고 있었다.



씻고 빨래까지 하고 나서 밥을 먹으러 나왔다. 빨리 나오지 않으면 시에스타 시간이랑 겹쳐서 애매해지기 때문에.. 시에스타 시간에는 문을 닫아서 거리가 휑하기도 하고, 어딜 들어가야 할지 잘 모르겠는 기분.


팜플로나는 활기찬 도시였다. 관광객들이 무척 많았다. 상점도 많기도 하고.. 본래 팜플로나에 들리면 근처 데카트론에 들릴 생각이었다. 데카트론은 대형 스포츠용품 매장인데, 첫날 숙소에 두고 온 스포츠용 브라탑을 하나 살 수 있을까 싶어서.. ㅜ 근데 막상 데카트론 위치를 보니 여기서 40분 넘게 걸어 나가야 했다.

씻고 나니 당최 팜플로나를 벗어나 걸어갈 힘이 나지 않았다. 배도 너무 고파서 먹을 것을 둘러보니 버거킹 발견! 치킨버거로 버거킹에서 배를 채웠다. 여기에 먹거리들도 많아 보였는데, 들어가서 어떻게 주문해야 할지 두리번거릴 생각 하니 몸과 맘 편히 햄버거나 먹자 싶었다. 배가 두둑해지니 여유로워졌다. 여기에 중국 마트가 있어서 라면도 두 봉지 정도 챙겼다. 아직까지 한국음식이 당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라면은 챙겨둬야지.

여기저기 상점을 구경하다 결국 스포츠용 탑을 싼 가격에 구입할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꼭 필요했던 물품이었다. 속옷 하나로 버틴다는 건 너무 좀...


마음이 더욱 여유로워져서 도시를 구경했다. 숙소 근처 성당 앞에서 커피 한잔도 하고 성당도 구경하였다. 작은 마을에도 성당 하나씩은 꼭 있었고, 어딜가나 종소리가 들렸다.

팜플로나 성벽 입구 쪽으로 나가니 길거리 음악 공연을 하고 있었다. 멍하니 감사하면서 기분 좋은 오후를 보냈다. 맑다가 흐리다가를 반복하며 바람이 많이 부는 날씨였다.


산티아고 길을 걸으면서 좋았던 것 중에 하나는 전혀 알 수 없었던 스페인 북부의 마을과 도시들을 자연스럽게 돌아볼 수 있었던 점이다.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같은 대도시는 알아도. 시골마을과 소도시들은 몰랐으니까.. 팜플로나가 처음 만난 도시였던 만큼 많이 둘러보고, 많은 생각에 잠겼던 거 같다. 둘러 쌓인 성벽 너머로 보이는 도시의 풍경이 기억에 남는다. 선선했던.. 아니 좀 쌀쌀하기까지 했던 날씨가 더욱 감상에 젖게 했다. 한여름의 까미노는 무척 덥다는데 한 낮이 아니면 아직까진 괜찮았다. 팜플로나에선 반바지는 입고 돌아다니지 못하겠을 정도로 바람이 많이 불어 추웠다.


저녁시간 숙소 부엌에 오니 여러 사람들이 요리를 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로 앉을자리가 없었다. 서서 과일과 요구르트, 빵으로 대충 때우는데 어떤 외국인 아주머니가 나에게 스파게티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미 배는 불렀지만 거절을 잘 못하고 마음이 고마워서 좋아한다고 하니 스파게티 한 접시를 듬뿍 받게 되었다. 너무 고마웠는데 엊그제부터 식도에 염증이 생겼는지 음식 삼키기가 어려워 많이 먹질 못했다. 서울에서 출발 전 알약을 하나 잘 못 삼킨 게 식도에 상처를 냈는지 삼킬 때마다 가슴이 답답하고 뭔가 찌르는 듯했다. 약도 없고, 먹는 것도 시원찮아서.. 걱정이 되었다. 식도염이면 죽을 먹어야 할 텐데...햄버거나 밀가루 음식을 먹게 되서 걱정이었다.


시끌벅적한 주방에 부산 사투리가 소란스럽게 들려 돌아보니 남자 셋이서 라면을 끓여먹고 있었다. 엄청 반가웠지만 '한국분들이세요?'라고 말 걸기가 뭔가 좀.. 더구나 세 명이서 뭉쳐있으니.. 나를 보아도 별 반응 없는 거 보면 관심이 없나 보다 싶어서.. 아는 척을 못했다. 그 친구들 하는 얘기가 얼핏 들리는데 40킬로쯤 걷고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전날 두 친구들이 떠올랐다. 역시 초반에 40킬로는 무리긴 하다. 말도 못 걸었지만 존재만으로 반가웠다.


삐걱거리는 2층 침대 위칸에서 일기를 쓰고 다음날 일정을 확인하고, 어느 알베르게에서 묵을지 정보를 찾아보고 하면서 하루를 마무리한다. 순례자들은 다들 비교적 조용하게 다음날을 준비하며 일찍 잠에 든다. 하루를 정리하며 너무 좋았던 것은 아직 삼일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걷고 걸었는데. 더 걷고 걸을 날이 많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