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언덕을 오르다

Day 4 팜플로나 - 푸엔테 라 레이나 25km

by ㅇㅁ

순례자의 길은 봄이나 가을이 걷기 제일 좋은 때라고 한다. 특히 봄은 정말 아름답다는 얘길 들었다. 걸으면서 연둣빛 혹은 울긋불긋 물든 까미노는 어땠을까 궁금했지만 그래도 여름 까미노를 택하기 잘 한 것 같다고 생각했던 건 해바라기를 실컷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좀 많이 덥긴 하지만, 습하지 않은 기후 때문에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걷는 순간 태양의 뜨거움을 전신으로 느낄 뿐.. 올여름 서울은 미친 더위였다는데, 그보다는 덜 덥지 않았을까.. 나는 서울이 폭염으로 난리가 난 기간을 까미노에서 보냈다. 여기도 뜨거운 태양에 까매지는 피부와 자외선 노출은 각오해야 했지만... 아침 저녁은 제법 쌀쌀했다.

4일째 되는 용서의 언덕을 올라가는 길에 보았던 해바라기 밭은 이번 여행 손에 꼽는 멋진 장소 중 하나였다. 한참 동안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보았던 거 같다. 수많은 해바라기가 고요히 해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연설을 기다리고 있는 군중 같았고 잠시 시간이 멈춘듯했다.




4일째 되던 날도 6시가 좀 못 된 이른 시각 출발하였다. 전날 잠을 제대로 못 자 몸이 살짝 피곤하였다. 잠을 잘 자는 건 정말 중요하다. 다음날 걷는 일에 영향을 미치니까..

도시를 지나 밀밭으로 펼쳐지는 길.. 다른 길로 잘 못 들어서지 않으려고 주변에 순례자들이 잘 걷고 있는지 두리번거리곤했다. 가끔은 앞서간 순례자가 길을 잘 못 들 수도 있으니 마냥 믿고 따라가서도 안될 일이다. 그래도 비교적 순례길은 친절해서 주위를 잘 살피고 걸으면 길 잃을 일이 별로 없었다.. 혼자 걷다가 오잉 어디로 가야 하지? 하는 시점엔 노란 화살표가 어디선가 뿅 하고 나타나 길을 지시하고 있었다. 그게 참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고.. 노란 화살표 찾기, 구간마다 도장 찍기 같은 것이 조금 사이즈가 있는 로드게임 같기도 하고.



8시가 넘은 시각이 되면 해가 떠오르기 시작해 나를 비스듬히 비춘다. 그림자가 길다.. 그 무렵 걷는 구간마다 느낌이 달랐던 것 같지만.. 이 날은 특히 이 때가 좋았던 거 같다. cizur minor라는 깔끔하고 단정한 마을을 지나면서부터 슬슬 동이 터 오르고, 넓은 밀밭이 펼쳐지던 때 세상의 빛깔은 누렇고 진했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고요한 아침이었다. 까미노에 와서 거대한 밀밭을 접한 건 이 구간부터가 처음인듯한데 밀밭 사이로 걷고 있으니 허수아비가 된 기분.. 밀 수확은 이미 이루어져 잘 깎겨 있었다. 순례길에선 내내 정돈된 누런 밀밭을 보게 되었다.

길을 걸으며 계속 오르다 보면 아름다운 풍경이 보이는 마을을 지나, 풍차가 멀리 보이는 언덕을 향해 계속 올라간다. 그러다 보면 해바라기들을 만나게 된다.. 태양을 기다리고 있는 무리들.. 오늘은 여기로 충분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 구간을 지나가기는 것이 무척 아쉬웠다. 애니메이션 속 한 장면 같았다. 현실감 제로.



계속 더 걷다 보면 용서의 언덕 정상에 오른다. 오늘은 유난히 여정이 길게 느껴졌다. 이미 밀밭과 해바라들에 마음을 뺏겨서인지 용서의 언덕에서 생각보다 깊은 감흥을 느끼진 못했다. 걷는데 많이 지칠때 였었는지..꽤 중요 포인트 지점인데..이름부터가 뭔가 다 털어버리고 용서하고 내려와야 할 것 같은데..더 더워지기 전에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을 주로 했던 거 같다..

언덕에 도착하니 마침 단체로 온 사람들이 성가를 부르고 있었다. 걸어온 그리고 걸어갈 평원을 볼 수 있었다. 반지의 제왕에 프로도가 된 느낌 같은 것이 들었다. 현실 복장은 세상 산악인인데..

과일이랑 음료를 파는 푸드 트럭에서 용서의 언덕에 왔다는 증명이라도 해야겠어서 세요를 찍고 잠시 전망을 감상하며 서 있었다. 당나귀와 풍차와 병사들의 조형물을 보니 돈키호테가 떠올랐다. 사람들이 사진을 많이 찍는 포토스팟이다.

용서의 언덕에 오를 때쯤엔 나를 성가시게 하는 마음의 문제들을 다 털어 놀 상태가 될 것을 기대했었다.근데 나는 자꾸 뭔가를 담아가기 바빴다.


갈 길이 멀다

이 언덕을 올라 내려가는 길쯤 무척 더울 때이고 한창 몸이 힘들 때였다고 기억된다. 사실 다시 이 길을 회상할때 육체적으로 힘들었던 기억은 별로 안 난다. 덥고 어깨도 아프고, 다리도 아팠던 거 같은데.. 지금 몸이 편하면 육신의 피로는 쉽게 잊을 수 있나보다.. 아니면 정말로 생각보다 그리 힘들지 않았던건지도..? 라기엔 순례길을 걸으면서 적었던 당시의 일기를 보니 고되었던 걸로..



길이 비슷비슷해 보여도. 같은 길은 하나도 없었다.

오늘 여러 종류의 길들과 여러 마을들을 지난 거 같은데.. 그래서 그런지 길이 참 길게 느껴졌다~

오바노스란 마을을 지나칠 때쯤이었나 누런 벽돌로 지어진 마을의 고풍스러움이.. 멋졌다. 대부분 돌들로 만들어진 집들이 었는데 꽤 오래된 역사가 있지 않을까 싶으면서.. 책에서나 보던 그런 유럽 중세시대의 마을이 상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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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푸엔테 라 레이나라는 이름이 예쁜 마을에서 쉬게 되었다. 마을 입구 쪽에 위치한 알베르게 하쿠에라는 곳을 사람들이 많이 추천하길래 갔는데 방이 예약으로 다 찼는지 제일 안쪽 구석 지하에 있는 방에서 묵게 되었다. 저녁 식사는 뷔페식이라 좋았지만 숙소는 기대했던 거 보단 별로 였다. 지하에다가 메트도 청결해 보이지 않아서.. 그리고 좀 무서웠다. 내가 제일 먼저 지하 숙소에 도착했기 때문에 아무도 없었으니까..


시간이 좀 지나니 하나둘씩 내가 묵는 공간에 사람들이 차기 시작했다. 반갑게도 한국인 아주머니 두 분이 바로 내 옆 침대로 오셨다. 이틀 만에 한국어로 수다 떨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난 것이다. 이분들은 자매 사이로 처음엔 쌍둥이인 줄 알았는데, 쌍둥이는 아니었다. 50대 후반쯤으로 보였는데, 두 분 다 똑같이 짧은 회색 빛 머리와 안경, 통통한 체격이셔서 외국인들은 분명 쌍둥이라고 생각할 것 같다. 사실 길에서도 본 적이 있긴 했었는데, 난 이분들이 중국분들인가 했었다. 흔한 한국인 아주머니의 느낌은 아니어서.. 꽤나 덥고, 힘들 텐데 대단하시구나 생각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많이 나누었다.

마침. 어제 보았던 부산 세명의 친구들도 이 숙소로 왔다. 드디어 인사도 나누었다. 그 친구들도 이제 막 취업을 준비하려는 대학생들이었다. 이제 한국인들이 우글우글하구나.


아무튼 아주머니 두 분과 저녁 식사를 함께하며 시간을 보냈다. 음식은 맛있었는데 계속 음식물을 삼킬 때마다 여전히 식도가 아파서 걱정되었다. 염증이 커질까 봐.. 그래도 먹을 건 다 먹었다. 한국에서는 술을 안먹은지가 오래인데.. 이곳에 와선 식사때마다 와인을 마실 수 있었다. 레이나 마을도 구경하고 싶었는데.. 너무 피곤해서 잠들어버렸다. 보통 7~8시쯤 저녁식사를 먹고.. 10시 전에는 잠이 드는 것 같다. 베드벅이 나오질 않기 만을 바라며.. 내일은 더 일찍 출발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