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5 푸엔테 라 레이나 - 에스떼야 20km
오늘은 5시 반이 좀 넘는 시각에 나섰다. 전날 시간을 함께 보낸 아주머니들은 걸음이 느리시다며 나보다 더 일찍 짐을 챙기시고 출발하셨다. 내가 좀 더 빨리 걸어 걷다 중간에 마주쳤지만 함께 동행하진 않았다. 또 만나겠거니..
혼자 걷고 싶었다. 내가 마음이 팍팍하지 않았더라면 이 길을 혼자 걷기보다 여럿이서 걷고 싶었을 것 같다.
요즘 티비에서 같이걸을까라는 프로그램에 지오디가 산티아고를 걷는 것이 나오던데, 보면서 공감도 많이 되고 또 저곳을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첫날 무리해서 내일 걸을 수 있을까 걱정하다가도 다음날이면 또 걷고 있다는 것에 놀라워하는 멤버들의 모습을 보며 공감했다. 그게 참 신기하다. 전날, 그 전날도 그렇게 많이 걸었는데 아침이 오면 또 걸을 수 있다는 것이..
도저히 갈 수 없을 것 같다가도 내일이 오면 또 내일을 살게 되는 것처럼. 마치 인생 같다.
레이나 마을은 어두운 새벽의 모습으로 밖에 볼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아침 일찍 출발할 때면 그럴 때가 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 이 곳의 모습은 어떨까. 궁금한.. 다시 올 가능성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그저 아쉽다. 산티아고를 두 번 걸을 일이 있을까.. 사람일은 모르는 거니까.
어두운 새벽 레이나 강과 다리를 지나 오늘도 긴 발걸음을 시작했다.
오늘은 어쩐지 일찍부터 더워지기 시작했다. 금세 후끈해지고, 길도 비슷비슷하게 느껴지며 다소 지루해져 가던 느낌이었다. 지나는 길엔 포도밭이 많았고, 골목골목 미로 같은 마을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지만.
컨디션이 썩 좋지 않아서인지 오늘은 좀 일찍 도착하고 싶었다.
식도염이 계속 신경이 쓰여서 아마 더 예민해진 듯했다. 변비도 걱정이라 뭘 먹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스페인은 딱딱한 바게트 빵이 주식인 거 같은데. 한국에서도 빵은 잘 안 먹는 체질인 데다 화장실 문제도 예민해서 아무래도 여기 있는 동안은 변비로 고생 좀 할 것 같았다.
점심때, 걸어가다가 컨디션이 영 엉망일 때 로르까라는 마을에 카페 겸 알베르게가 있어서 들어갔는데 반갑게도 외국인이 한국말로 인사를 했다. 주문하려는데 진짜 한국인 분이 나타나서 주문을 받았다. 아마 스페인 분과 결혼하셔서 여기서 살게 된 모양이셨다. 너무 반가워하시면서 괜찮냐고 물으셨다. 내 상태가 별로 안좋아보였나보다. 토마토와 각종 야채가 듬뿍 들어간 샐러드를 주셨다.
야채가 신선하고 맛있었지만, 식도염 때문에 쓰리고 아팠다. 가슴을 찌르는 통증이 계속되어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조금 쉬고 나니 제정신 차리고 다시 걸을 수 있었다.
오늘은 에스떼야 마을까지 가서 마을 초입에 있는 호스텔에서 묵게 되었다 가죽공방과 함께 한다는 호스텔은 상업적인 면모가 있긴 했지만, 생긴 지 얼마 안 되었는지 깔끔하니 좋았다. 여자 방이 따로 있었고, 샤워시설이나 화장실도 깨끗했다. 부엌과 휴게실도 강가가 보여 조용하고 쾌적했다. 강 옆이라 그런가 방안에 모기가 좀 많아서 엄청 많이 물리긴 했지만..
주인아저씨가 운이 좋다며 마침 오늘 에스떼야에 축제가 있다고 했다. 숙소에서 씻고 빨래하고 마을을 좀 둘러볼까 하고 나왔다. 골목골목 이런저런 상품들을 파는 가판대가 쭉 놓여있는 걸로 보아 장터 같은 것이 열리는 참이었다. 때마침 시에스타라 마켓은 잠시 쉬는 참이었는지 거리는 조용했다. 한두 시쯤 도착하여 씻고 나오면 시에스타와 겹쳐 항상 가게들 대부분 닫혀있다. 그리고 무척 뜨겁다. 바짝 마를 것 같은 쨍함.
그런 평온함이 좋았다. 둘러보니 에스떼야는 생각보다 컸다.
광장 쪽에 나와 앉아 있는데, 벤치에 한국인 여자애가 쉬고 있었다. 피부가 벌게져가지고 넋 놓고 있는 모습이었다. 방금 도착한 모양이었다. 여기 와서 혼자 온 한국 여자를 보는 건 처음이라 무척 반가워 인사했다. 그 친구도 걸으면서 사람들에게서 내 얘길 들었다고 했다. 드디어 만났다면서..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는데 내 얘길 들었다니.. 오며 가며 그래도 나를 본 외국인들이 여기에 한국인 여자가 또 있다고 알려줬나 보다.
S는 스페인어도 잘하고 영어도 잘하는 굉장히 활기찬 친구였다. 역시나 대학 졸업과 취업을 앞두고 이곳을 온 상태. 현지 가이드 생활도 하고, 꽤 여행을 많이 하는 친구였다.
가방을 앞뒤로 메고 피레네 산맥을 넘었다고 했다. 이렇게 힘든 줄 모르고 짐을 잔뜩 가져왔다고. 그 친구는 산맥을 넘을 때 장대비도 와서 정말 힘들었다고 한다.
자기는 여기 와서 너무 힘들다고 왜 이곳을 걷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며 걸었다고 했지만 아마도 이 친구는 산티아고에 와서 앞으로 더 많은 친구를 사귀고 많은걸 얻고 돌아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S는 내가 전 숙소에서 보았던 부산 친구들과 저녁을 먹기로 했다고 해서 나도 함께 조인하기로 하고 좀 더 둘러보기로 했다.
혼자서 둘러보는데 어떤 분이 유리공예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신기해서 계속 쳐다보고 있으니까 아저씨가 자기가 유리로 풍선처럼 만들어서 터뜨리면 "예~!"하고 소리쳐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아저씨가 입으로 불어서 유리를 불고 ‘뻥’ 하는 소리를 내며 터뜨리자 사람들은 "예~!" 하고 소리쳤다 터뜨려진 유리는 반짝반짝 빛나는 가루처럼 바람에 흩날려 하늘로 뿌려졌다. 너무 영화 같은 한 장면이었다.
이 곳 축제는 노인들을 위한 축제였는데 정확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시에스타가 종료되고 다시 영업을 시작하는 시간이 되자 골목 거리는 걸어가기 어렵게 북적대었다.
S와 부산 친구들과 저녁에 다시 만나니 반가웠다. 저녁이라고 해도 아직 훤한 낮같아서 같이 축제도 좀 둘러보고 먹을때를 찾아보았다.어디서 무엇을 먹어야 할지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여럿이서 먹는 거라 새로운 스페인 음식을 먹어보고 싶었지만 결국 잔뜩 둘러만 보다가 무난하게 광장 쪽 레스토랑 야외테이블에 앉아 맥주와 고기진 음식과 함께 만찬을 나누었다.
서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는데 S는 여행의 목적이 이 곳을 즐기며 경험을 누리는 것이였고, 부산 친구들은 800km를 기간내에 완주하는 게 목표였고, 나는 비우고 회복하는 거였던 거 같다. 나빼고 다들 20대들이라 그들의 젊음이 부럽기도 했다. 길을 걷는 중에 만난 사람이 S에게 '너가 이 길을 걷는 동안 모든 사람이 너를 도와줄 거야' 라고 했다고 한다. 왠지 그 말이 기억에 남는다.
내일은 또 각자의 길을 걸었지만 지금 와서 참 궁금하다 그들은 완주하고 어떤 마음이 들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