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르쥬아 섀도우

- 20년째 버리지 못한 것 -

by 재인

남자친구와 헤어진 다음 날,

백화점 안에 입점한 미용실에 갔다.

긴 머리를 자르긴 아까워서

뽀글뽀글 파마를 했다.

파마를 하고 나오니

얼굴이 너무 밋밋해 보였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다가 화려한 조명과 시끄러운 마이크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1층에서 메이크업 쇼를 하고 있었다.

프랑스 색조 화장품 회사 브르쥬아의

메이크업 아트쇼였다.


지나가는 사람을 데려다가 화장을 해 주고, 화장품을 팔거나 홍보하는 행사.

신제품 론칭 행사인지 중앙홀에 무대처럼

꾸며져 있었다.


평소의 나였으면 아무 관심도 두지

않았을 것이다.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이라면, 저런 데 앉아 화장을 받는 사람들이 한가해 보인다고 생각했겠지.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마음의 빈 공간이 너무 버거웠다.

무엇으로든 채워야 했다.

그래서 또각또각 걸어 행사장 앞으로 갔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바로 앉으라며 단상 위 가장 앞자리로 안내했다.

“아무렇게나 해 주세요.”

내 말이 끝나자 아티스트의 눈이 반짝했다.


뜨거운 핀 조명.

눈앞에 펼쳐진 수백 가지 색조 화장품들.

나는 압도당한 채 지금의 상황을 잠시 잊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갔다.


수십 개의 메이크업 붓이 아티스트의 손에서 춤추듯 빠르게 바뀌며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붓에 묻어 있던 가루들은 내 얼굴에 안착하거나, 공기 중으로 날아가 무지개 가루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핀 조명 아래, 천천히 퍼졌다가 사라지는

그 가루들을 보고 있자니

분수쇼를 보듯 황홀했다.


마음이 점점 붕 뜨고,

나도 저 가루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려는 찰나였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백설공주의 엄마가 들여다봤을 법한

커다란 거울을 내게 비춰 주었다.


거울 속의 나는 내가 아니었다.

내가 지금까지 본 누구도 아니었다.

방금 전 ‘사자 머리’ 파마를 한 것도

새삼 깨닫고 놀라운데,

얼굴은 더 놀라웠다.

에메랄드빛 파란 펄 눈두덩이라니.

이런.


예쁜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달라진 것이 속 시원했다.

다른 사람이 된 듯 홀가분해진 나는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 파란색 민소매 니트를 샀다.


세상 촌스러운 모습으로 거리를 활보했다.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화려한 거리.

혼자 얼굴에 비를 맞은 듯 파란빛이 번지고,

파란색 빗물이 얼굴 위로 흐르는 것만 같았다.


다음 날 어김없이 하루가 시작되었고,

나는 평소처럼 출근했다.

함께 했던 과거와 함께 할 미래가 있다고 믿었기에 혼자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던 나는

이제 혼자가 되었음을 순간순간 감지했다.


평소 말이 잘 통하던 직장동료에게

남자친구와 헤어져 제정신이 아니라고 하자,

자기가 아는 오빠가 한 명 있다며

소개팅을 해 보지 않겠냐고 했다.


나는 아무거나 먹고, 아무거나 사고..

연장선으로 아무나 만나기로 했다.


소개팅 당일 아침, 퉁퉁 부은 얼굴로

화장대 앞에 앉은 나는

브르쥬아 섀도우를 꺼냈다.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해 준 것처럼

눈두덩이를 파랗게 칠했다.


눈이 부어서 이상해 보이는 건지,

파랗게 칠해서 이상해 보이는 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파란색 니트까지 입으면 안 될 것 같아

하얀 블라우스에 하늘색 미니스커트를 입었다.


저녁 7시, 강남역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 앞에서 만난 소개팅 남은 나를 보고 놀라는 표정이었다.

아직 자리 잡지 않은 사자머리에 파란 눈두덩이.

감당하기 어려웠으리라.


그런데 나도 놀랐다.

오늘 내 차림은 이렇지만,

본래 유교걸에 기독교걸인 나는

귀걸이에 야구모자를 힙하게 눌러쓴 그가

더 낯설었다.

공대에 교회 오빠라 하기엔 너무 가벼워 보였다.


서로 마음에 안 드는 게 뻔했지만

골드메달리스트를 원샷하고 즐겁게 떠들었다.

예의상 전화번호를 주고받고

쿨하게 헤어졌다.


2주 후, 뜬금없이 그에게 연락이 왔다.

나는 별 기대 없이 약속을 잡았다.


이번엔 평소 내 모습대로

맨얼굴에 긴치마를 입고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그를 만났다.


그리고 내게 첫눈에 반한 게 아니라

두 번째 눈에 반했다는

지금의 남편과 친해지기 시작했다.


20년이 지난 지금, 내 화장대 서랍에는

브르쥬아 섀도우가 여전히 있다.

남편은 첫 만남으로 기억하고,

나는 다르게 기억하는.


일 년에 한 번씩 대대적인 정리를 하는

화장대 서랍 안,

오랫동안 한쪽 구석에 있는 이 물건을

나는 아직도 버리지 않는다.


그때의 남자친구도 브르쥬아 섀도우처럼

마음 한편에 여전히 있다.


나보다 더 염세적이어서

나를 밝게 했던 그.
아픈 가족사가 있어

나의 가족사를 가볍게 해 주었던 그.
그의 형이 죽었을 때, 나의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곁에 있었던 우리.
20대에 확립되기 시작하는 세계관을

함께 만들어 갔던 젊은 날들.


지금은 각자의 우리가 있는 그와 나.

한 번쯤은 보고 싶다.

잘 지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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