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을 나는 기분을 기대했는데 -
우리 동네 아파트 단지 한가운데에는
예쁜 놀이터가 있다.
그곳엔 그네가 두 개 있는데,
늘 아이들이 줄을 선다.
혼자 타는 아이, 둘이 타는 아이,
누군가가 밀어주는 그네를 타는 아이.
나는 습관처럼 그네 쪽을 본다.
오늘은 비었나, 하고.
어렸을 때 할머니와 놀이터에 가는 걸 좋아했다.
할머니는 서른 번 밀어주기로 약속했고
그네를 밀어주면서 숫자를 셌는데
할머니의 숫자 세는 소리와 내 귀를 스치는 바람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는 소리가 좋았다
고등학생 때는 밤늦게 독서실에서 돌아오다가
그네 의자에 걸터앉아 잠시 쉬었다.
달을 올려다보며 친구들과 우리의 작은 세계를 맘껏 얘기했다.
큰 아이를 낳고부터 작은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나는 그네를 밀어주는 기계가 되었다.
아이들은 매일 놀이터에 가자고 했고,
그네를 밀어달라고 했다.
그네를 밀고 있으면 아이들을 뒤쫓지 않아도 됐으니
그 시간이 오히려 ‘쉬는 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이 혼자 놀기 시작한 뒤로는
놀이터에 가는 일이 줄었고,
막내의 입시가 끝날 때까지는
놀이터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런데 요즘 나는 다시 그네를 본다.
내가 다시 탈 수 있을까.
하늘을 나는 기분을 다시 느낄 수 있을까.
그네는 대체 언제쯤 비어 있을까.
아이들을 얼추 키워놓고 중년에 접어들자
나는 인생을 다시 기대하게 되었다.
하고 싶은 일 목록 어딘가에
은근 슬쩍 ‘그네 타기’가 끼어 있다.
그래서 나는, 그네가 비는 날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자정을 넘겨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친구들을 만나 자식들을 얼추 키워낸 서로를 칭찬하며 와인을 한 잔 했다.
한 친구는 빚을 거의 갚았다 했고,
한 친구는 이혼 후의 상처가 아물어
이제야 좀 편안하다고 했다.
우리가 모두 아는 친구의 친구는
자다가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했다.
나는 말했다.
이제는 본연의 나로 돌아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즐겁고 싶다고.
그 말을 품고 걷다 문득 생각했다.
오늘은 혹시
그네가 비어 있지 않을까.
놀이터가 보이기 전부터 나는 걸음을 빨리했다.
그네 두 개가 모두 비어 있으면 좋겠고,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으면 좋겠다.
아니—아무도 나를 보지 않았으면 싶었다.
놀이터에는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나는 기대하며 모래를 밟고 그네로 갔다.
그런데 오랜만에 밟아보는 모래는
폭신하지 않았다.
구두를 신은 발이 푹푹 빠졌다.
힘들게 걸어 그네 앞에 도착해 앉았다.
사뿐히 앉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네 의자는 생각보다 낮고 좁았다.
나는 휘청했고, 미끄러질 뻔했다.
몇 번 자세를 고쳐 앉아 중심을 잡았다.
그제야 ‘앉았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이제 시작이다.
줄을 양손으로 꼭 잡고
무릎을 폈다가 빠르게 접고
다시 앞으로 뻗는다.
그런데 발을 구르는 순간
구두에 묻어 있던 모래가 얼굴 가까이 튀어
눈으로 들어왔다.
나는 휘청이며 그네를 멈췄다.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눈을 닦아보지만
모래는 나오지 않았다.
생수병을 꺼내 손바닥에 물을 붓고 눈을 씻었다.
한바탕 눈물을 쏟고 나서야 통증이 멎었다.
기운이 쭉 빠진 채 다시 발을 굴러본다.
이번엔 너무 세게 차지 않고 살살 다리를 저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다섯 번쯤 다리를 접었다 펴자
나는 어느새 높이 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내가 상상했던 기분이 아니었다.
너무 어지러웠다.
하늘을 나는 자유로움이 아니라
레벨 높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은 어지러움.
나는 어떻게 멈춰야 하는지 떠올리지 못해
다리를 쭉 뻗고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눈을 감고 양쪽 줄을 꽉 잡고
그네가 멈추기만을 기다렸다.
한참을 왔다 갔다 한 뒤에야
그네가 멈췄고,
내 발은 다시 바닥에 닿았다.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세 시간 전에 와인을 마셔서 그래.
그네는 원래 어지러운 게 아닌데 술 때문이야.
아까 눈에 모래가 들어가서 눈물이 나는 거야.
친구의 친구가 죽었다는 말이 남아서 그래.
그네는 비어 있었지만
내 마음은 비워지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