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빛과 그림자, 그 사이 -
떡진 머리는 집게핀으로 올려 꽂고
목욕용품을 주섬주섬 챙겨 집을 나선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대로를 따라 걷다가
코로나 전에 가본 적 있는 사우나에 들렀지만
문이 닫혀 있다.
긴 코로나를 이기지 못하고
문을 닫았으리라 추측해 본다.
핸드폰을 꺼내 가까운 사우나를 찾고
리뷰를 훑는다.
대체로 평이 좋다.
그런데 많은 리뷰 중
‘세신사가 이상하다’는 글이
눈에 밟힌다.
세신을 맡기진 않을 거라 생각하며,
한 번 가 보기로 한다.
바람이 많이 부는 오늘
머리 위에선 나뭇잎들이,
발 밑에선 그림자들이
상큼하고 발랄하게 춤을 춘다.
그림자에도 색이 있다.
실체의 색을 통과한 빛은
각각의 모양으로
미세하게 색과 채도와 명도가 다르다.
키가 큰 은행나무의 그림자는
경계가 흐리고 옅다.
키가 작은 관목들의 그림자는
야무지게 선명하다.
그림자를 피하며, 밟으며
나도 그림자처럼
춤추듯 길을 따라 걷는다.
오랜만에 들어간 사우나 입구엔
주인으로 보이는 아줌마가
남탕과 여탕의 경계에 있는
작은 부스 안에 앉아 있다.
결제를 하고
수건 두 장과 키를 받아
여탕으로 들어간다.
익숙한 물 냄새,
화장품 냄새,
비누 냄새.
좋다.
오늘은 조용히
냉탕과 건식 사우나를 오가며
쉬고 싶다.
사우나 안으로 들어가니
몸은 공기 반, 물 반의
허공을 걷는 것 같다.
몸 안으로도
공기 반, 물 반의 숨이 들어간다.
사우나 내부는
천장과 벽면 곳곳에 설치된
백 개도 넘는 전구들이
빛을 사방으로 보내고 있다.
하지만
빛을 막아선 물체가 없는 듯
이곳엔 그림자가 없다.
여러 각도로 전구가 뿌려대는 빛들이
실체와 연결되어 만들어져야 할
그림자의 생성을 방해하고 있다.
그럼 그림자들은
어디로 간 걸까.
처음 인식한 비현실적인 느낌을 뒤로하고
목욕용품을 내려놓을 자리를 잡는다.
사우나 안은
여유롭고 평온하다.
샤워기와 바가지에서 쏟아져 나온 물이
어딘가에 부딪히는
단조로운 소리만
간간이 들린다.
세신사의 영역인
세신 구역에서만
물소리 이외의,
등을 탁탁 치는 소리와
이야기 나누는 소리가 있다.
나는 몸을 깨끗이 씻고 머리를 감고
건식 사우나와 냉탕을
조용히, 천천히
세 번 오가려고 마음먹는다.
한 여자는
전문직 딸과 의사 사위의 아이들을
성심껏 키워주었지만
딸이 고마워하지 않고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며
서운해했다.
듣자 하니
집안일하는 아줌마와
애 봐주는 아줌마가 있는데도
친정엄마까지 거들어
도움이라기보다
참견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처음 한 바퀴를 돌 때
눈을 감고 들었던
‘판교에 집을 지었고,
고등동에 건물을 지었다’는
톤 앤 매너는 사라졌다.
다른 여자는
맞벌이인 두 딸의 아이들을
돌봐주고 있다고 했다.
자신은 딸들과
선을 지키기 때문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여유를 부렸다.
하지만 두 번째 바퀴에서는
남편 은퇴 이후
생활이 팍팍하고
아이들을 봐주는 게 힘들며,
딸들에게 돈을 받는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고 얘기한다.
내가 세 번째 바퀴를 돌기 시작하자
첫 번째 여자는
나를 따라 냉탕에 들어오며
두 번째 여자를 욕한다.
자식과 선을
어떻게 잘 지킬 수 있냐며
그건 선을 지키는 게 아니라
냉정한 거라고
언성을 높인다.
세 번째 바퀴의
건식 사우나 안에서
다시 만난 두 번째 여자는
남의 인생에 참견하면 안 된다고
첫 번째 여자를 욕한다.
그리고
내 동의를 구한다.
나는 이 두 여자의 이야기를
잠잠히 들었고
두 여자는
실컷 말하고 떠났다.
사우나를 하고
몸이 가벼워진 것 같았으나
머리는 더 무거워진 것 같다.
목이 뻐근해
머리를 한 바퀴 돌리며
세신 구역을 지난다.
세신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린다.
남편이…
친구가…
옆집 여자가…
세신 구역의 바닥에는
검은 그림자가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