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이 모든것이 내 것이었다 -
-Hello, I’m calling because I heard there’s a Korean captain.
-Yes, thanks for using our boat tour. You mean the Korean captain? He’s here.
-Is it possible to have a boat tour tomorrow evening?
-Wait a minute… Yes, you can. How many people?
-I’m the only one.
-You have a reservation. Dinner and snorkeling are booked.
-Thanks. Bye.
전화를 끊고 잠시 멍하게 있는다.
이상하게도 **“한국인 선장”**이라는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파슨스 디자인 스쿨에서 함께 공부했던 재키가 보트 투어를 추천해 줬다.
회사를 그만두고 떠났던 크로아티아 여행 중, 현지의 보트 투어가 인상적이었다고.
“거기엔 한국인 선장님이 있어. 그게 진짜 좋았어.”
그 말을 듣는 순간부터 마음이 편해졌다.
낯선 여행 중 마음이 잠깐 기댈 곳을 찾은 느낌이었다.
3년 전, 디자인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이력서에 한 줄이 추가 됐을 뿐 달라진 건 없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을 지나
고등학생이 되었다.
대학을 나와 사회생활을 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이혼을 했다.
다시 혼자가 되어 공부를 더했지만
결국 나는 또 처음으로 돌아왔다.
이제 또 어디서 무엇을 하게 될지.
하게는 될지.
기대보다 먼저 피로감이 밀려왔다.
내가 원했는지도 모른 채 시작된 것들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재키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받을 수 있어?"
"그럼. 거기 날씨 끝내주지? 나도 또 가고 싶다."
재키의 목소리는 가벼웠다.
어떤 사람은 작은 일에도 무너지는데 어떤 사람은 큰일을 지나도 가벼운 목소리를 유지한다.
재키는 그런 사람이었다.
"보트 투어 예약했어.
네가 아니었다면 한국인 선장님은 상상도 못 했을 거야."
"고마워. 마지막 밤은 한국말하면서 좀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맘껏 즐기고 돌아와. 인생 뭐 있냐!
돌아올 때는 다른 네가 되어 있기를 바란다.
어디 취업하게 되면 꼭 연락하고."
‘다른 내가 되어 있기를.’
재키는 가볍게 말했지만,
내겐 아주 어려운 주문 같았다.
전화를 끊자 방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마치 누가 내 어깨에 손을 얹고 있다가
손을 떼고 간 것처럼.
수료 후에도 재키와 같은 곳에서 일하고 싶었다.
하지만 취업은 그녀에게만 허락되었다.
나는 아직,
어느 곳에서도 콜을 받지 못했다.
눈을 떴을 때 해는 이미 가장 높은 곳에 떠 있었다.
오른손은 침대 밖으로 뻗쳐 있었고,
손끝이 닿는 곳에는 빈 와인병과 와인잔이 굴러다녔다.
마스카라가 엉겨 붙은 속눈썹 때문에 눈이 좀처럼 떠지지 않았다.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눈꺼풀을 벌리고 창 쪽을 본다.
창밖은 너무 밝고 따뜻하고 화사했다.
이 밝음이 낯설었다.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밝은 것을 경계하게 되었을까.
하얀 침대시트를 몸에 두르고 창가로 걸어갔다.
크로아티아의 햇살은 머리카락처럼 가는 칼날이
수없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섬세하게 땅에 스며든 칼끝들은 부러지지도 흩어지지도 않았다.
나는 해가 기울 때까지 멍하니 앉아 있다가
일어난다.
오늘 저녁, 요트를 타기로 했으니까.
해변으로 내려가는 길에서 전화 속 남자의 목소리가 자꾸 떠올랐다.
You have a reservation.
Dinner and snorkeling are booked.
'예약 완료.'
그 말이 여행의 문장이 아니라 내 인생의 판정문 같았다.
누군가 내 삶에 대해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해준 적이 있었나.
나는 요트 선착장으로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왜 이제야 오세요? 해변을 다 뒤졌어요.
아! 얼른 가야 해요. 곧 석양이 시작된다고요."
그는 내 이름을 확인하자마자
섬세하게 손을 잡아
요트 위로 올려주었다.
거친 외모와 달리 그의 손길이 조심스러워서
마음이 놓였다.
선장의 팔뚝에는 깊게 남은 상처들이 단단히 아문 채 남아 있었다.
제정신이 아니던 어느 날, 어설프게 그었던 내 손목의 상처가 떠올랐다.
내 상처가 갑자기 작아보였다.
그래서 그가 편하게 느껴졌다.
요트 위로 오르는 동안 바닷물이 내 발목과 실크 스커트를 스쳤다.
들고 온 가방과 구두가 거추장스러워 배 한켠에 내려놓았다.
"이제 출발합니다. 안전 수칙은 아시죠.
떨어지지않게 자리 잘 잡으세요."
그 말은 경고가 아니라 허락이었다.
지금부터 펼쳐질 것들을 모두 즐기라는...
빨간 조개껍데기 같은 해변의 집들이 점점 멀어진다.
바다 표면에서 일어난 물보라가
요트 뒤편 소파까지 끝없이 튀어 올라
내 쉬폰 블라우스를 축축하게 달라붙게 만들었다.
거추장스러웠지만 싫지 않았다.
점점 풍경이 단순해진다.
바다와 하늘의 빛깔이 여러 층으로 갈라진 채
하나의 공간이 되었다.
그 공간은 내가 알고 있던 삶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저기요, 선장님! 선장님!"
내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흩어졌다.
"수영복으로 옷 좀 갈아입어도 될까요?"
생각보다 물보라가 심해서 옷을 갈아입어야 할 것 같아요.
"네. 계단으로 내려가시면 옷 갈아입으실 방이 있습니다.
갈아입고 나오세요.
지금부터는 다른 배들도 없는 곳으로 갑니다.
10분만 더 가면 스노클링 하실 수 있는 좋은 곳이 있습니다."
다른 배들도 없는 곳.
그 말이 마음에 남았다.
다른 사람이 없는 곳이 아니라,
다른 배도 없는 곳이라니.
내가 갇히지 않고도 누릴 수 있는 곳이 있다는게 나를 충만하게 했다.
내 인생을 매번 제로로 되돌리는 신이
오늘만큼은
'오늘은 이 모든 게 네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나오니 배의 속도가 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계단을 올라가자 요트는 이미 멈춰 있었다.
선장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선장을 찾을 겨를도 없이
나는 아무도 없는 바다와 마주했다.
맑은 표면에 발을 대자 옅은 농도의 젤리 같은 감촉이 발목을 감쌌다.
낯선 촉감에 나도 모르게 “아…” 하고 소리가 났다.
그때 선장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어떠세요? 볼만하죠. 수영은 할 줄 아시죠?
물안경 쓰시고 맘껏 놀아보세요.
저는 스노클링 하시는 동안 저녁 준비합니다.
랍스터 스파게티에 화이트 와인입니다.
오늘 랍스터가 크고 좋습니다."
"네. 그런데 와인 얘기는 없었던 것 같은데요."
선장은 조금 웃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석양엔 와인이죠.
제가 드리고 싶은 분께만 몰래 드립니다.
다녀오세요."
그 말에 이상하게 가슴이 철렁했다.
드리고 싶은 분께만.
나는 누군가에게 이런 존재였던 적이 있었나.
그때서야 발 밑에 수백 마리의 물고기가
나를 의식하지 않고 노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겁 없이 뛰어들었다.
겁 없이 결혼한 것처럼.
아이를 낳은 것처럼.
이혼한 것처럼.
겁 없이 뉴욕으로 날아간 것처럼.
물속에서 노란 물고기 한 마리를 따라
산호가 붙은 바위까지 내려가자,
넙치 한 마리가 진동을 일으키며
내 겨드랑이 사이를 스쳐 지나간다.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거북이 한 마리가
선명한 등껍질을 드러내며 내 머리 위로 지나간다.
다들 겁이 없다.
숨이 차서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뚫고 올라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숨을 들이마시다가,
나도 모르게 눈이 커진다.
석양이 시작되고 있었다.
세상에 없는 색이 눈앞에 펼쳐졌다.
붉다고 하기엔 너무 눈부셨고,
눈 부시다고 하기엔 너무 따뜻했다.
따뜻하다기엔 슬펐고,
슬프다기보다는 아름다웠다.
온전히 나를 감싸는 포근한 기운에
마음 깊이 위로받았다.
마치 이곳에서만 허락되는 빛이
'괜찮다' 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어때요? 기대 이상이지 않습니까?
여기 있는 모든 게 너무 예뻐서 감각이 없겠지만 배고프실 거예요.
이제 올라오시죠."
선장이 커다란 수건을 펼쳐 나를 맞았다.
나는 물 밖으로 올라오며 잠깐 흔들렸다.
선장은 망설이지 않고 내 팔을 붙잡아 주었다.
그 손길이 안정적이어서,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손을 편하게 잡았다.
요트 안쪽 테이블에는 단정한
식사가 준비돼 있었다.
올리브잎이 수놓인 식탁보 위에
화이트 와인과 랍스터 파스타가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투박하게 잘라둔 바게트와 바질 페스토가 식탁을 더 따뜻하게 만들었다.
"감사합니다. 맛보기도 전인데 벌써 설레네요."
나는 어쩐지 이 순간을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았다.
"실례가 안 된다면, 식사 함께 하시겠어요?"
선장은 잠깐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럴까요? 오늘은 유난히 석양이 좋으니."
선장과 나는 석양과 마주하는 방향으로 나란히 앉았다.
두 시간 전까지만 해도 존재조차 몰랐던 사람과,
나는 지금 가장 따뜻한 모습으로 같은 식탁에 앉아 있었다.
"선장님도 한잔 하셔도 되나요?"
"한잔은 할 만하죠."
선장은 한국에서 은행에 다녔다고 했다.
십여 년 전 대규모 감원으로 명예퇴직을 했다는 이야기까지 조용히 이어졌다.
“그때는요, 모든 게 끝난 줄 알았습니다.”
그는 혼자 이곳저곳을 여행하다가 결국 이 바다에 머물게 됐다고 했다.
처음엔 머무는 것이 아니라 도망치는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다시 시작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파도 소리와 함께 그의 지난 이야기를 듣자 마음이 더욱 편안해 진다.
세상에서 밀쳐진 사람이 나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나를 조금 가볍게 했다.
그리고 더 이상하게,
그가 ‘끝’을 말할 때마다 나는 ‘처음’을 떠올렸다.
끝이 오면 다시 처음도 온다는 것을...
석양이 따뜻한 채 사라지고
남색 하늘이 드리웠다.
요트에 물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나의 두려움이 깨지고
모든 실패와 좌절이 부서진 채
한데 섞여 발밑으로 사라진다.
나는 이제 다시
나의 처음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마치 내게도 다시 올
콜이 있다는 듯이.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