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
남편에게 여자가 있다는 걸 깨달은 건
결혼하고 1년도 되지 않아서였다.
결혼하기 전엔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결혼을 하면 정리가 되리라 생각했다.
눈길만 스쳐도 몸속의 세포가 날뛰던 날들이 지나자
남편은 그녀에게 가겠다고 통보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던 약속을 지키러 가는 사람처럼.
나는 첫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고
남편은 그녀의 집에서 밤낮을 지내고 오는 일이
잦아졌다.
5주년 결혼기념일에 제주도로 여행을 갔다.
두 아이들을 키우느라 망가진 몸속에 숨어 살던
시절이었다.
크리스털과 대리석으로 뒤덮은 호텔 로비에서
아이들을 따라다니느라 넋이 나가있을 때
프라다와 에르메스로 휘감은
그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나를 바싹 마른 바퀴벌레 보듯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날도 남편은 그녀의 방에
오랫동안 머물다가 아이들이 모두 잠든 후에
돌아왔다.
그녀 앞에 서 있을 때 남편의 표정은
이상할 만큼 순해 보였다.
해가 거듭될수록 남편은 대놓고
그녀와 나를 비교했다.
나는 남편을 향해 헌신적인 사랑을 하는 그녀를
따라갈 수 없었다.
그녀는 남편의 어릴 적 이야기까지 알고 있었지만
나는 오늘 하루 있었던 일도
끝까지 나눌 여유가 없다.
나의 무기는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아이들도 점점 알게 되어가는 눈치다.
아빠가 엄마보다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는 것을.
아이들은 약아서 어느 편에 서야 얻을 게 많은지
알고 있다.
힘 없는 엄마보다 힘 있는 아빠 편에 선다.
남편은 승진을 하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
그녀에게 먼저 이야기했고,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녀를 통해
남편의 일들을 알게 되었다.
남편의 신임을 얻고 있다는 확신이 선 그녀는
점점 나의 영역에 파고들어 목을 조여 온다.
나와 그녀 중 한 명을 선택하라고
남편에게 말했을 때
남편은 그녀를 선택했고
나는 정신과 전문의를 찾아갔다.
남편을 그녀에게 주고 돌아서라는 조언과 함께
항우울증 치료제를 처방받았다.
의사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원래부터 그랬던 관계 같아요.”
오늘은 남편이 아침부터 분주하다.
남편 서재에 백화점 쇼핑백이 있고,
금빛 리본이 묶여 있는 것을 보니
그녀를 위한 선물인 것 같다.
남편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옷을 벗고 욕실에 들어간다.
유리문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등을 보다가
순간적으로 무언가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이 스쳤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직은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아
무턱대고 덤비는 대신
예쁜 카드에 편지를 쓴다.
손이 떨리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
— 생신 축하드려요. 어머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