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살이 향하는 곳

- 그날, 나는 슬리퍼를 가지런히 놓았다 -

by 재인

"예진아~"

대문은 늘 그랬던 처럼 열려 있었다.

예진이네 집은 늘 들어가도 되는 집이었다.


나는 대문을 열고 예진이네 마당으로

뛰어들어가 현관문을 열었다.


예진이와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같이 놀았다.

예진이 아빠는 우리 아빠를 형이라고 불렀다.


그날도 요술공주 밍키 슬리퍼가

뒤집어지도록 신나게 벗고

예진이네 집으로 들어갔다.


평소 같았으면 뒤집어진 슬리퍼는

신경 쓰지 않고

예진이 방으로 들어갔을 텐데,


그날은 뭔가에 끌려 현관 쪽을 돌아보았다.


코가 뾰족하고 굽이 뾰족한 분홍색 구두가

놓여 있었다.


나는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밍키 슬리퍼를 분홍 구두처럼

가지런하게 놓고

그 분홍색 구두에 발을 넣어 보았다.

굽이 어찌나 높은지 앞으로 넘어질 뻔했다.


"민주야, 예진이 외갓집에 갔다.

다음에 와라."


반쯤 열려 있는 안방에서

예진이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방 바닥에는 파란 이불이 있었고

그 위에는 아기가 있었다.


그리고 아기 옆으로는 어떤 여자가

앉아 있었다.


"네, 안녕히 계세요."

나는 얼른 예진이 집에서 나왔다.


예진이가 없다는 말에 기운이 쭉 빠졌지만

공터에서 다른 친구들이 고무줄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마음이 급하다.


공터와 학교 운동장 그리고

몇 곳을 더 가 보았지만

친구들은 없었고 놀지도 못하고

뛰어만 다닌 꼴이 되었다.


나는 슬리퍼를 질질 끌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 갔다.

그런데 우리 집 현관에도

분홍색 구두가 놓여 있었다.


고개를 들어 엄마 말소리가 들리는

부엌 쪽을 보니

아까 예진이네 있었던 그 여자가

엄마와 함께 있었다.


내가 집으로 들어가자 둘은

서둘러 말을 멈췄고

엄마는 기침을 하며 나에게

방으로 들어가라 했다.


"네."

나는 대답을 하고 내 방으로 가면서

엄마와 여자가 있는 부엌 쪽을 봤다.


식탁 의자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지만

아까 보았던 파란 이불의 아기는 없다.


'아기는 예진이네 집에 두고 왔나?'

갑자기 아기가 걱정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아기가 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엄마, 나 조금만 더 놀고 올게."

나는 뒤돌아서 현관문을 쾅 닫으며

뛰어나왔다.


열심히 달려 예진이네 집 앞에 도착했다.


하지만 아까처럼 쿵쾅거리며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아서

대문을 소리 나지 않게 조용히 열고 마당을 조심조심 지나 현관문 앞으로 갔다.


집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어쩐지 현관문을 열 용기는 나지 않아서

집 모퉁이를 돌아 거실 창문 쪽으로 갔다.


까치발을 하고 거실 안을 보았다.

집 안은 조용했고 아무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갑자기 배가 고팠다.

보름달 빵이나 사 먹고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하며 대문 쪽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모퉁이를 돌려는 순간

예진이 아빠가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게 보였다.


엄청 피곤하신지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셨다.


아저씨는 바로 현관으로 들어가지 않고

현관 앞 계단에 앉아 담배를 꺼내신다.


아저씨의 담배 연기를 보니

잠깐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다른 시간은 멈추고 담배만 타서

연기가 되는 조용한 시간.


나는 어쩌다 보니 숨어 있는 꼴이 되어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왠지 지금 인사를 했다가는

어떤 흐름을 끊는 꼴이 되어

어디론가 향하던 화살이

나에게 꽂힐 것 같았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려는 것을

허리를 바짝 접어 막아 본다.


다행히 꼬르륵 소리가 나기 전에

아저씨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셨고

조금 후에 집 안에서 소리가 났다.


예진이 엄마의 울음소리,

그리고 곧이어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났다.


다행이다.


아기가 예진이 집에 있어서.


나는 조심조심 대문을 열고 나왔다.


너무 배가 고파서 장수 슈퍼에 들러

보름달 빵을 사서 먹으며 집으로 갔다.


슈퍼 아줌마가 집에 누가 왔냐고 묻길래

모른다고 얘기하고 나왔다.


현관엔 분홍색 구두가 사라졌고

나는 엄청 졸려서 바로 내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엄마는 잠깐 들어와 나를 보고

그냥 나가신다.


다행이다.

밥을 먹으라거나, 씻으라거나,

오늘은 잔소리가 없다.


다음 날 예진이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외갓집에서 자고 오는 모양이었다.


학교에서 나오면서 잠깐 망설인다.


엄마가 학교 끝나면 집에 와서

가방을 내려놓고

놀러 나가라고 했는데,


예진이네 있던 아기가 너무 궁금하다.


오늘은 둘리 운동화를 신어서

빨리 뛸 수 있었고


이미 나는 장수 슈퍼를 지나고 있었다.


장수 슈퍼 앞 툇마루에는 슈퍼 아줌마와

우유 아줌마가 신나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가까이 가니 예진이네 어쩌고

하는 소리가 들려

나는 일부러 천천히 그 앞을 지나간다.


민주네 어쩌고 하는

내 이름이 나오는 것 같아

곁눈으로 아줌마들을 봤다.


아줌마들도 나를 보더니 눈을 반짝이며

나에게 옥수수를 먹겠냐며

이리 오라고 한다.


"민주야, 예진이 오늘 학교 왔니? "


"아니요."


"어제 엄마 아빠 안 싸우시던?"


"우리 엄마 아빠 원래 안 싸우는데요."


"그래 그래. 됐다. 알았다.

옥수수나 하나 가지고 갈래?"


엄마는 내가 밖에 나가서

집안 얘기하는 것을 싫어한다.

싸운 얘기는 더 싫어할 것 같아서

아니라고 했지만 사실 잘 모른다.


뒤통수가 따갑다.

진짜로 뭐가 꽂힌 것처럼.

아줌마들이 나에게 작은 화살들을

던지고 있는 것 같다.


이런 화살은 피할 수가 없다.

뛰어간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지금은 맞고 빨리 고무줄놀이나

달리기를 하면 된다.


내가 기분이 좋아지면

내 등에 꽂힌 화살쯤은 금방 사라진다.


빨리 친구들을 만나야 할 텐데.


얼른 집에 가방을 내려놓고

친구들하고 놀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집 대문을 열었다.


현관문을 열려고 하는데 엄마 목소리가

문을 뚫고 나온다.


"민주 아빠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잖아."


"형님! 민주 아빠 아니면 이 새끼가

어디서 그년을 만났겠어요?"


예진이 엄마는 우리 엄마에게

폭탄 같은 화살을 쏟아내고 있었고,

우리 엄마는 그대로 화살을 맞으며

아줌마의 손을 잡고 있었다.


"김 대리랑 예진 아빠랑 눈이 맞을 줄 누가 알았겠어."


지금은 집에 들어가면 안 될 것 같다.

어른들은 우리가 싸우면 혼내지만,

우리는 어른들 싸움을 모른 척해야 한다.


엄마들은 큰소리를 지르다가 울다가

끌어안다가 난리다.

다행히 화살 쏘기는 멈춘 것 같다.


예진이 엄마가 우리 집에 있다면


아기는 집에 혼자 있다는 건가?


나는 가방을 현관문 앞에 던져 놓고

뛰어나간다.


장수 슈퍼 앞에는 아직도 아줌마들이

옥수수를 먹고 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얼른 뛰어간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지도 못하게

빨리 뛰어 예진이네 집에 도착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간다.

갑자기 아기가 없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된다.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아무도 없다.

조용하다.


안방문이 조금 열려 있다.

외계인이 내는 것 같은 작은 소리가 난다.


아기가 여기 있구나.


조심조심 안방으로 들어간다.

어제 보았던 파란 이불 위에

아기가 누워 있다.


아기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아기도 나를 가만히 본다.


만져보고 싶었지만 울 것 같아서

보고만 있다.


어린이날 선물로 받은 양배추 인형만큼

큰 것 같다.


양배추 인형도 거뜬히 안는 나인데

아기라고 못 안을까 싶어 용기를 낸다.


나는 아기를 힘껏 들어본다.


생각보다 아기는 무거웠고

내 인형들과 달리 아기의 몸은

흐느적거렸다.


아기는 작은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큰일 났다.


나는 당황했지만 맛있는 걸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기의 물건이 담겨 있는 가방이 보였다.


그 안에는 기저귀, 분유 통, 작은 수건들,

내가 좋아했던 공갈 젖꼭지도 있었다.


나는 얼른 공갈 젖꼭지를

아기 입에 넣어 보았지만

아기는 계속 작은 소리로 울면서

싫다고 하는 것 같았다.


계속 가방을 뒤져 보았지만

아기가 좋아할 것 같은 것은 없었다.


과자라든가 사탕이라든가

뭐 그런 게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가방에 있는 모든 것을 꺼내고

가방을 톡톡 털었지만

맛있는 것은 없었다.


가방 안에 작은 지퍼가 보였다.

지퍼를 열어 보니 사탕은 없고

종이만 하나 있었다.


네모 모양 리본으로 접혀 있다.

어떻게 펼치는지 모르겠다.

종이를 이리저리 만지다가

종이가 열렸다.


막상 종이가 열리자 나의 손안에

화살 무더기가 들어온 것 같다.


내가 종이와 씨름하는 동안

아기는 조용해졌고

나는 쪽지를 펼쳐 보았다.


사모님께

사모님 죄송해요.

이 아기를 사모님께 맡기긴 하지만.

아이의 이름을 예범이로 해야 할지

민수로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와서 이런 말씀드려 죄송합니다.


나는 금방 알아차렸다.

이 아기는 이름이 두 개라는 것을.


우리 할머니는

민주인 나를 똥주라고 부르니까.


이름이 두 개인 게 무슨 큰일이라고.

예범이보다는 민수가 좋다.


내 이름하고도 비슷하고.


민수가 계속 예진이네에 있었으면 좋겠다.


매일 와서 업어줘야지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데 종이를 처음 모양처럼

접을 수가 없다.

큰일 났다 싶을 때 현관으로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예진이었다.


나는 얼른 종이를 주머니에 넣고

아무렇지 않은 척 예진이 쪽을 본다.


"너 왜 학교 안 왔냐?"

나는 주머니 속 종이를 꼭 쥐고 있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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