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버려야 할 것들 -
윤이는 동창회에 오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윤이의 소식을 다시 들은 건 20년 만에 참석한
동창회에서였다.
부산에서 사업하는 남편과 살고 있다던 윤이가
서울에 올라왔다고 했다.
윤이 얘기가 나오자 몇몇 친구들이 불편한 듯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우리는 골치 아픈 현실의 이야기는 금방 접고
야자 시간에 찬물을 부어 먹었던 사발면 얘기,
담 넘다가 교복 치마 찢어진 얘기들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한 자리에 앉아서 두 시간이 지날 즈음,
종업원의 안내를 받으며 룸으로
한 친구가 더 들어왔다.
굵은 웨이브로 세팅한 긴 머리,
윤이였다.
“얘들아, 잘 있었어?”
마침내 자리가 끝자리였고,
옆자리에 올려두었던 가방과 옷을 의자에 걸고
이리 오라고 손짓을 할 참이었다.
천천히 자리를 정리하는데
갑자기 공기가 멎는 침묵이
나의 등 뒤를 덮쳤다.
“야! 너 여기가 어디라고 와!”
동창회장인 성주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윤이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표정에 변화 없이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천천히 걸어
빈자리가 된 내 옆자리로 와서 앉았다.
그 모습을 본 성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 일어나!”
“성주야. 오해야.”
“네가 안 일어나면 내가 간다.”
친구들은 빠르게 코트와 가방을 챙겨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도 가자고 눈짓을 했지만
윤이만 남겨 두고 가야 하는지,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멍하게 있는 동안
친구들은 순식간에 룸에서 사라졌다.
커다란 룸에 둘만 남게 되었다.
방금 전까지 시끄러웠던 공간에
깨끗한 적막이 흐른다.
윤이는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비어 있는 잔에 와인을 따랐다.
윤이는 아무 말 없이 와인을 마셨다.
남긴 카나페와 치즈들을
천천히 윤이 쪽으로 밀어주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니
지금까지 보지 못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산중턱에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은
늦가을 단풍 진 나무에 둘러싸여 있었고,
밤이 되니 한강이 시선 아래로 더 잘 보였다.
어두운 밤하늘에 흐린 별이 드문드문 있다.
“너는 왜 안 일어났어?”
“너만 두고 가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어서
그냥 있었네.”
남은 쥬스를 마저 마시려고 잔을 들자
윤이는 내 얼굴을 빠르게 스캔했다.
아, 맞다.
윤이는 이런 아이였지.
사람을 당황시키는 눈빛과
눈의 움직임을 가진 아이.
윤이는 전체적으로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부분 부분을 뚫어지게 본다.
공항 검색대의 스캔봉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고 내려간다.
친구들과 같이 일어났어야 했나,
섬뜩한 느낌이 드는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먼저 일어난 성주였다.
윤이를 앞에 두고 전화를 받는 건
석연치가 않아서 전화를 끊었다.
바로 메시지가 왔지만 보지는 않았다.
전화의 진동이 또 울린다.
이번엔 남편이다.
지금은 통화하기가 불편해서
남편 전화도 받지 않는다.
“우리도 그만 일어날까?”
“나한테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도 돼.”
“아니야. 다음에. 오늘은 그만 가자.”
코트와 가방을 챙겨 카운터로 갔다.
윤이도 천천히 내 뒤를 따라오는 것 같았다.
“그럼 윤이야, 다음에 보자.”
“그래. 조심히 가.”
뒤돌아서 주차장 쪽으로 가려다가
문득 이곳이 산중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가 없다면
택시를 불러야만 하는 외진 곳.
“근데 차는 가져왔니?”
“아니, 괜찮으면
지하철역까지만 태워줄래?”
레스토랑에서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길은
좁은 언덕을 내려오는 도로였고,
가로등이 있지만 조도가 낮아
충분히 도로를 살피기 어려웠다.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 그때
밖에서 선명한 ' 악' 하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차 세워!”
윤이는 밖에서 들리는 비명보다
더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왜? 무슨 일이야?”
“눈이 마주쳤어.
그냥 지나갈 수가 없어.”
눈이 마주치다니, 누구와?
나는 얼떨결에 차를 갓길에 세우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윤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새끼 고라니 한 마리가
다리가 꺾인 채 앉아 있었다.
차에 치여 도로에 앉아 있는 고라니는
깊고 큰 눈망울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이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윤이는 고라니가 구조되는 것을
보아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다.
나는 차로 돌아와
거치대에서 핸드폰을 빼내어 열었다.
거기엔 성주가 보낸 메시지가 있었다.
하지만 신고가 먼저라
읽어볼 겨를 없이 119에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119죠?
여기 고라니가 도로에
다리가 부러진 채 있어서 전화했어요.”
“저희가 선생님 핸드폰을
위치 추적해도 되겠습니까?”
“네, 그러세요.”
“그럼 잠시만 기다리세요.
출동하면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119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꼴이 되었다.
시간은 11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오가는 차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윤이는 고라니보다 몇 발자국 앞에서
손을 흔들며
차들이 옆으로 비켜갈 수 있도록
수신호를 하고 있다.
그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지만
옆에 있어 줄 수도,
같이 손을 흔들 수도 없었다.
깊은 한숨을 쉬며 미처 읽지 못한
성주의 메시지를 본다.
너 아직도 윤이랑 같이 있는 거 아니지?
윤이 걔 나쁜 년이야.
혜선이 이혼한 거 걔 때문이야
사고라더라
윤이는 상향 헤드라이트를 켠 채
다가오고 있는 차들을 향해
쉴 새 없이 두 팔을 휘젓고 있다.
나는 고라니가 불쌍해서인지,
성주의 메시지가 믿어지지 않아서인지
계속 그 자리에 서 있다.
온다는 119는 계속 위치를 찾을 수 없다며
전화만 한다.
내가 위치를 설명하며
도로를 왔다 갔다 하는 사이에
윤이와 고라니가 없어졌다.
놀라서 차로 돌아왔더니 윤이가 뒷자리에
고라니를 안고 타고 있다.
“야! 너 뭐 하는 거야! 당장 내려!”
“우리가 동물병원에 데리고 가자.
119에서 우리를 계속 못 찾잖아.
내가 근처에 24시간 동물병원 찾았어.
거기까지만 태워줘.
그다음엔 내가 알아서 할게.”
윤이의 어이없이 당당한 요구와
이미 차에 태워진 고라니의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그래, 동물병원까지 만 이야.
나는 운전석에 앉았다.
룸미러로 뒷자리를 보자
윤이의 카멜색 코트에도 차의 크림색 시트에도
고라니의 피가 묻어 있다.
레스토랑에 남기고 온 크림 뇨끼 위의
적포도주 드레싱처럼
예쁘고 선명하게 망쳐졌다.
동물병원은 10분 거리에 있었다.
나는 뒷자리가 신경 쓰여
어떻게 운전을 했는지 모르겠다.
간간이 고라니는 신음소리를 냈고,
그 소리는 꼭 아기의 울음소리 같았다.
“혜선이 남편 일은 오해야.
그리고 그건 그냥 사고였어.”
"사고라는 걸 보니 무슨 일이 있긴 있었니?
그럼 그게 무슨 사고야?”
“너 사고가 뭔지 모르니?”
“너는 사고가 아닌 걸 모르니?”
동물병원에 도착했다.
윤이는 자기가 먼저 갔다 오겠다며
병원으로 들어갔고,
나는 고라니와 둘이 있을 수 없어서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뒷자리에 있는 고라니를 본다.
윤이가 안고 있을 때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던 고라니가
이제 고개를 시트 위에 떨구었다.
동물병원에 들어갔던 윤이가 나왔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차에 타서 문을 닫는다.
“야! 뭐 하는 거야. 여기서 내린다고 했잖아.”
“동물병원에서 고라니를 받지 않는대.
안 되겠어. 저 앞에 경찰서까지만,
한 번만 더 가.”
당장 이것들을 내 차에서 끌어내
던져버리고 싶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다.
그래, 경찰서까지만 가는 거야.
거기서 정말 안녕이야.
한 블록 앞에 있는 경찰서에는
윤이와 같이 들어갔다.
이제 여기서 어떻게든 끝내야겠다는 생각에
더 이상은 한 발짝도 물러설 수 없었다.
12시가 넘은 시간이었고 경찰서 안은 한산했다.
“죄송하지만 고라니는 농가에 피해를 주는
야생동물이어서 포획 대상이지 보호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럼, 있던 곳에 놓아주어야 할까요?"
나는 윤이와 다시 차에 탔다.
그리고 내비게이션에 동창회 장소였던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찍었다.
고라니를 발견했던 그곳을 지나
레스토랑을 지나 더 언덕 안쪽으로 들어갔다.
더 이상 차가 올라갈 수 없는 지점에 이르러
차에서 내린다.
나와 윤이는 고라니를 양쪽에서 들고
숲 속으로 들어간다.
발 밑에 밟히는 게
나뭇잎인지,
흙인지,
진흙인지 가늠하지 않았다.
그저 좀 더 안쪽에 데려다 놓기 위해
더, 더 들어갔다.
그리고 발밑의 느낌이 비교적 평평하고
조금은 부드러운 지점에
고라니를 내려놓는다.
고라니는 아직 따뜻하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주변이 깜깜해서 그 눈빛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던 길을 내려온다.
구두 안의 발에서 피가 난 것 같은
찐득함과 통증이 느껴진다.
비상등을 켜고 온 차가 저 앞에 보인다.
뒷자리를 열어 윤이의 가방을 들어
길가에 던지듯 팽개친다.
그리고 돌아보지 않고 앞자리에 앉아
운전을 시작한다.
한참을 내려와 큰 도로에 인접했을 때
숨을 가다듬고 내비게이션을 켜려고
핸드폰을 열었다.
남편의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와 있다.
여보, 정말 미안해.
그건 사고였어.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