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방법이 없다 -
땅만 보고 걷다가 고개를 들었다.
파란 하늘 아래로 독서회 모집 플래카드가 펄럭인다.
사이트에 접속하니 금요일 저녁 7시에 한 자리가 남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아이 둘을 둔 전업주부입니다. 제 이름은 음… 김은주입니다.”
누구의 엄마도, 아내도 아닌 내 이름.
그 이름이 낯설어 잠시 멈칫했다.
“저는 테크노밸리에서 일하고 있는 윤여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게임 만드는 박규식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정성일이라고 합니다.”
정성일?
멍하니 소개를 흘려듣다가
익숙한 이름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십여 명의 사람들 속에
나를 똑바로 응시하는 눈빛이 있다.
어디서 본 듯한 눈빛이었다.
대학 때 연합 동아리에서 만나
1~2년 친구들과 같이 몰려다녔던 같은 학번.
“네, 모두 반갑습니다.
오늘은 첫날이니 가벼운 단편으로 시작하도록 할게요.”
오늘의 작품은 안톤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입니다.
강사의 줄거리 요약과
여러 사람들의 서평이 이어졌다.
각자 가정이 있는 두 남녀가
휴양지에서 우연히 마주치고,
사랑에 빠지게 되고……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는 간간이 웃고,
자기의 느낌과 생각을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지지하거나 공감한다.
안경을 쓰거나 벗을 때, 고개를 숙이거나 들 때
성일이와 한 번씩 눈이 마주쳤다.
강사가 다음 책을 소개하는 시간이 지나고
모두 의자에서 일어난다.
주섬주섬 책과 필기구를 정리하고 있을 때
책상 위로 형광등 불빛을 가려주는
편안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고개를 들자 희미한 기억 속의 이미지가
실체와 겹쳐진다.
“은주야!”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시간은 많이 지났지만
짙은 눈썹과 밝은 미소는 그대로였다.
“성일아, 오랜만이야. 잘 지냈지?”
“나야 요즘 MZ들 비위 맞추느라 뺑이 치고 있지.
너는 애가 둘이라고? 근처 살아?”
“응, 너는?”
“나도 근처. 오늘은 사무실 다시 들어가 봐야 하고.
다음에 밥 한번 하자. 전화번호 뭐야.”
어렸을 때 알던 사이라는 경계 없는 친밀감에
자연스럽게 전화번호를 주었다.
다음 독서회 전에 만나 커피 한 잔 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에 들어오니
현관 센서등이 나를 맞을 뿐 집에는 아무도 없다.
금요일 밤.
두 아이는 학원에서 오는 길이겠고,
남편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신발장 앞에 붙어 있는 전신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을 본다.
푸석한 머리,
건조한 입술,
무채색 옷과 걷기 편한 운동화.
20대와는 많이 달라진 거울 속 내 모습이
오늘은 더 낯설다.
“오빠! 욕조는 이게 어때?”
“너 좋을 대로.”
“프리스탠딩으로 할게. 좀 큰 게 좋겠지?”
일과가 전환되는 순간에
습관처럼 남편의 핸드폰에서
캡처해 둔 대화 내용을 찾아 들여다본다.
“라운딩 끝나고 지금 가.”
“오빠! 올 때 당근 케이크랑 말차 프라푸치노 좀 사 와.”
“와인은 있나?”
남편의 핸드폰에 깔아놓은 도청 앱을 켠다.
처음엔 떨렸던 이어폰을 꽂는 손이
이제는 망설이지도 않는다.
변호사는 필요할지 모르니 모든 증거를 모으라 했다.
만약을 위해 정신과에 가서 상담도 하고 있다.
상속받은 아파트를 판 돈으로
남편은 누군가에게 오피스텔을 사주고
욕조와 인테리어를 바꿔준다.
나는 변호사를 만나고 정신과 의사를 만난다.
5억, 5천만 원, 5백만 원, 50만 원…
“책 좋아하는 건 여전하구나!”
판교 도서관 근처 스타벅스에서
다시 만난 성일이는
일주일 전보다 말끔한 모습이었다.
셔츠깃이 살짝 나온 차콜색 니트에 청바지,
깨끗한 스니커즈,
희끗희끗하지만 단정한 머리 모양.
편안하게 나이 든 모습이 반가웠다.
나도 지난주보다는 나아지려고
머리도 만지고 립글로스도 바르고
작은 귀걸이도 했다.
“너는 책 안 좋아하지 않았나?
책도 안 좋아하면서 동아리에 들어왔다고
내가 놀렸던 것 같은데.”
“그게 언제 적 얘기냐!
너랑 헤어지고 군대 갔는데 할 일이 없더라고.
그때부터 책 읽기 시작했다.
네 덕이야. 뭐 마실까?”
나는 아무 사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성일이 생각은 달랐던 것 같다.
아무 일 아닌 듯 생각의 차이를 웃음으로 얼버무리고
우리는 뜨거운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를 한 번씩 마시며 한 번씩 보고,
한 번씩 웃는다.
“아내랑 아들은 프랑스에 있어.
애가 클라리넷을 전공해.
나만 돈 버느라 힘들어 죽겠다.”
살던 집은 전세를 줬고,
그 돈으로 아이가 유학을 하고 있으며
성일이는 판교역 근처 오피스텔에서
지내고 있다고 했다.
나는 아들 하나, 딸 하나라고 말했다.
남편 이야기는 운 좋게 진급 잘한
평범한 직장인이라고만 하려고 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한마디가 더 튀어나왔다.
“몇 년째 바람피우고 있어.”
컵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성일이의 눈이 커졌다가 말을 멈췄다.
“미안, 오랜만에 만났는데 내가 미쳤나 봐.
별말을 다 하네. 그냥 말이 나왔어.
신경 쓰지 마. 못 들은 걸로 해.”
“못 들은 걸로 하긴 그렇고, 다음에 밥 살게. 힘내.”
이런 소리가 듣기 싫어서 나는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는다.
힘을 내라,
참아라,
끝내라,
속상하겠다.
그런 얘기를 듣지 않기 위해
나는 의사와 변호사에게 매번 돈을 내고 얘기한다.
그들은 어설프게 나를 위로하려 하지 않는다.
“오늘의 책에 대해 말씀 나누기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난주에 미처 나누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요.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은
표면적으로는 불륜에 관한 이야기지만
개인의 내면으로 들어가면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안일한 일상을 추구하던 남자 주인공과
피동적으로 살아가던 여자 주인공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지면서
진정한 자신을 알아가게 되는……”
성일이와 차를 마시다 조금 늦게 독서회
강의실로 들어오자
강사가 지난주 책에 대해 첨언하고 있다.
지난주에도 이 이야기를 들었다.
오늘 또 이어진다.
나는 의자를 소리 나게 끌며 일어난다.
몇 사람의 눈이 나를 따라붙는다.
나는 강의실을 등지고 나온다.
수개월 만에 신은 구두를 팽개치듯 벗는다.
깜깜해야 하는 거실이 환하다.
큰아이가 교복을 입은 채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뒤적이고 있다.
“학원 안 갔어?”
“오늘 학원 수업 없다고 엄마한테 말했었잖아.
나 배고파.”
얼른 냉장고를 연다.
다듬어 놓은 채소들을 꺼내고
냉동실에서 고기를 꺼내
빠르게 볶는다.
“엄마, 오늘 뭐 시켜 먹고 싶은데, 안 돼?”
“시켜 먹긴. 집에서 해 먹어야 건강하지.”
떨떠름한 아이의 얼굴을 뒤로하고
우삼겹을 볶는다.
조미료가 많이 들어간 음식을 먹는 것보다는
집에서 직접 한 음식이 수험생에게 좋을 거라며
나를 볶는다.
맛이 없을까 봐
굴소스를 한 스푼 더 넣는다.
참치액젓을 한 스푼 더 넣는다.
“엄마! 할머니 전화받았어?”
부재중 전화로 시어머니에게 전화가 와 있었던 게
이제야 생각난다.
“전화 좀 하래."
애들은 공부 잘하니?
아범 건강검진은 왜 안 한다니.
몸이 여기저기 안 아픈 데가 없다.
언제 올 거니.
사는 데 돈이 너무 많이 든다.”
예상되는 말들에 이미 가슴이 답답하다.
다음 금요일은 금방 돌아왔다.
의자를 소리 나게 끌며 일어나 예의 없이 뛰쳐나왔다는 생각에
독서회는 그만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성일이는 지난주에 급한 일이 있어서 나갔냐며, 오늘은 수업 후에 잠깐 보자고
톡을 보냈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그러자고 했다.
독서회를 마치니 9시가 훌쩍 넘었다.
커피숍들이 하나둘 문을 닫아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성일은 조심스럽게 한 블록 옆 건물을 가리켰다.
“라면 먹고 갈래?”
익숙하고 진부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이 그저 농담이 아닌,
오랜 시간을 통과해 온 마음처럼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일의 오피스텔은 폐업한 가구점의
쇼룸 같았다.
멈춘 시간 속에 가구며 집기들이
모두 잠들어 있는 느낌이었다.
창문을 열자 커튼이 살짝 흔들린다.
바깥의 공기와 소음이 들어와
오피스텔을 흔든다.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는 듯하다.
“미안. 내가 주인 허락도 없이 창문부터 열었네.”
“허락은 무슨. 가끔 와서 환기 좀 시켜라.
피곤하면 한숨 자고 가도 되고.”
“그럴까? 같이 자 줄래?”
“어렵진 않지.”
성일은 부엌 선반에서 언더락 잔을 두 개 집어 온다.
식탁 옆 진열장에 양주가 서너 병 있다.
그중 익숙한 한 병을 꺼낸다.
“군대 가기 이틀 전에 너 보러 갔었다.”
“어딜?”
“어디긴! 너네 학교.”
“왜?”
"그땐 내가 여자를 좋아한다고 믿었어..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지.
그래서 너에게 달려간 거야.
평범해지고 싶어서.
입대 전이쟎아”
성일의 작은 오피스텔을 걷던 내 걸음이 멎었다.
내가 남편 얘기를 했을 때
성일이 뭐라고 했더라
되새긴다.
"못 들은 걸로 하긴 그렇고, 밥은 내가 사야겠는데..."
우리는 서로를 보며 살짝 웃었다.
성일이는 잔에 커다란 돌얼음을 두 덩이 넣는다.
얼음은 맑고 투명한 소리를 내며 잔 안에 떨어진다.
얼음이 잔에 부딪히는 소리가 우리를 둘러싼 공간에 잔잔히 퍼진다.
언더락 잔을 손목 스냅으로 빙글빙글 돌린다.
얼음이 계속 잔에 부딪혀 날카로운 상쾌함을
빈 공간으로 퍼뜨린다.
“그럼 밥은 네가 사는 거다.”
성일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퍼지고,
나는 성일의 잔에 위스키를 채운다.
성일이는 나를 물끄러미 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묻는다.
“우리 회사에서 단기 아르바이트 구하는데
해 볼래?”
“나?”
“응, 너. 할 일이 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가벼운 제안이었지만 왠지 당황스러웠다.
“나 할 일 많아.”
“뭐?”
“집 치우고, 장 보고, 밥 하고, 애들 픽업하고,
학원 설명회 다니고 바빠.”
남편의 핸드폰을 도청하고 카톡을 캡처하느라,
변호사를 만나고 정신과 상담을 받느라
바쁘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그래도 네 일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대답 대신 침묵한다.
“별로 어려운 일 아니야.
직원 대상 직무 만족도 조사 같은 거야.
엑셀은 할 줄 알지?”
“됐어. 아르바이트는 무슨.”
엑셀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함수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생각해 봐.”
가볍게 한잔하고 오피스텔을 나선다.
도청 앱을 켠다.
남편의 일상은 오늘도 그녀와 얽혀 있다.
오늘 이 둘은 호텔 라운지에서 커피도 마시고,
피트니스에서 운동도 한다.
그리고 같은 방에 들어간다.
나오면서 호텔 베이커리에서 빵과 쿠키를 산다.
나는 화려한 판교 테크노밸리의 불빛들이 사그라진
텅 빈 거리를 오랫동안 걷는다.
긴 거리를 돌고 돌아 집에 들어오니
자정이 훌쩍 넘었다.
독서회에 가기 전에 미처 하지 못한 설거지가
싱크대에 가득하다.
들어온 그대로 설거지를 한다.
남편이 호텔 베이커리 봉투를 들고 집에 들어온다.
선물 받았다며 버릇처럼 아이들의 방에 노크를 하고 하나씩 넣어 준다.
그리고 나머지는 싱크대 위에 올려놓는다.
그가 건넨 쇼핑백에서 호텔 로비 향이 난다.
나는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베이커리 쇼핑백을 들어
안방으로 걸어가던
남편의 뒤통수에 집어던진다.
퍽!
쿠키가 담겨 있는 플라스틱 케이스가
남편의 뒤통수에 맞고
바닥에 떨어진다.
식탁 위에 놓여 있던 꽃병을 집어
남편을 향해 던진다.
꽃과
꽃병 속의 물과
꽃병이
남편을 스쳐지나 거실 아트월에 부딪힌다.
유리 파편들이 바닥에 날카롭게 흩어지고
물방울들이 벽을 타고 흘러내린다.
아이들이 놀라 방에서 뛰어나온다.
그 일이 있고 남편은 핸드폰 기종을 바꿨다.
더 이상 남편의 통화 내용을 듣지 못한다.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었던 자해가
거둬졌다.
남편은 끝까지 아니라 했고,
나는 끝까지 도청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 어떠셨어요?”
강사는 안경을 고쳐 쓰며 시선을 한 명 한 명 맞춘다.
검은 표지 위, 백인 남자의 옆모습이
스케치되어 있는 책.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것 같은 이야기.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대학살이다.’
라는 부분이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외국 남자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끝까지 읽다 보니
제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들이 돌아가며 책을 읽은 소감을 이야기한다.
나는 내가 책 속에 밑줄 그은 구절이 있었는지
찾아본다.
손가락이 페이지를 넘길 뿐,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책상만 바라본다.
필기하는 척 조용히 숨는다.
그때
옆자리에 성일이 앉는다.
말없이 내 책을 가져가
83페이지를 펼친다.
그리고 천천히 밑줄을 긋는다.
주인공이 딸에게 반복해서 한 말.
하지만 현실을 다시 만드는 건 불가능해.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여.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여라.
다른 방법이 없어.
나는 그의 손끝을 바라보다
조용히 책을 덮는다.
나는 일어난다.
하염없이 걸었던 거리를 또 걷는다.
와라.
나는 버티고 서서
나에게 오는 것들을
기꺼이 맞이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