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 열려 있는 날

- 현관까지는 20 발자국 -

by 재인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현관까지는 20 발자국이다.


보통은 10 발자국만 가면 알 수 있다.
오빠나 언니가 엄마랑 싸우고 있는지 아닌지.


오늘은 조용하다.
아직은 아무 일이 없는 것 같다.


오늘은 급식이 맛이 없어 보여서

급식실엔 가지도 않았다.
점심을 먹지 않았다고 하면

엄마의 컨디션에 따라

배달 음식을 시켜 먹을 수 있다.


문 밖으로 싸우는 소리가 나지 않으면

거의 된 것이다.
마라탕이나 탄탄면이 먹고 싶긴 한데….


띠띠띠. 띠띠띠. 띠리링~


집 안이 조용하긴 한데 너무 조용하다.
이런 조용함은 보통 좋은 조용함이 아니다.


오빠랑 언니의 기말고사 마지막 날이라

집에 오빠, 언니가 있을지도 모르고
안 들어왔을지도 모른다.


오빠 스니커즈가 현관에 있는 걸로 보니

오빠는 들어왔구나 싶다.

엄마 구두가 현관에 있는 걸 보니

엄마는 나갔다가 왔나?


하여튼 엄마도 있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불안하게.


신발을 벗으며 거실로 들어서는 순간,
안방 문이 '' 소리 나게 열리며

엄마가 거실로 나온다.


“학교 다녀왔….”

엄마의 눈이 불을 뿜는다.

나를 못 봤을 리가 없는데

엄마는 나를 지나쳐 오빠 방 문을 벌컥 연다.


아— 마라탕으로 정했는데.


“이 새끼야, 아까 그 여자애 누구야?

네가 지금 여자나 집에 불러들일 때야?”

“나 이렇게라도 스트레스 풀지 않으면 공부 못 해.

내 방에서 나가.”


허걱. 오빠.


엄마는 오빠 방에서 한참을 소리 지른다.


지난번처럼 오빠가 엄마를 밀칠까 봐 조마조마하다.

그날 오빠가 과외선생님을 두 시간 기다리게 했나?
오빠를 때리려는 엄마 손을 오빠가 잘못 막아서

엄마가 넘어지는 일이 있었다.


여자랑 있었다고?


집에 아무도 없는데?


미친놈.


엄마는 몇 분 더 소리를 지르다가

오빠가 더 소리를 지르자

오빠 방에서 나와 안방으로 들어갔다.


오빠는 방문을 부서지게 닫고 딸깍 하고 문을 잠근다.


일단 끝.


집에서 배달 음식을 시켜 먹긴 그른 것 같다.


나는 후드를 눌러쓰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엘리베이터를 탄다.


단지 안에 있는 편의점은 일단 패스하고 아파트 밖으로 나간다.


엄마와 친한 주인아줌마가

잔소리를 많이 하기도 하고
뭘 먹었는지 누구랑 놀았는지 지나가는 아줌마들이

모두 말하고 다녀서 귀찮다.


걷다 보니 언니 학교 앞까지 왔다.

엄마는 이 아파트 단지에서 우리를 키우기로 작정했다.

이 단지 안에는 초, 중, 고가 다 있다.


엄마는 늘 뭔가를 찾고 있다.

거실 한쪽엔 프린트가 쌓여 있다.
학원 상담표, 비교표, ‘합격 후기’ 캡처본.


엄마는 줄을 긋고 동그라미를 치고,
종이들은 계속 쌓여간다.


나도 다음 주면 시험 기간이지만 우리 집에서

중2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오빠 고3. 언니 고1.


의대 가시겠다는 오빠에,
의대 갈 수 있는 성적이 나오는지 봐야 하는

언니가 계시니
엄마는 나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다.


휴. 다행이다.


배고파.

다시 뒤돌아 잔소리 편의점에 들어갔다.


불닭볶음 삼각김밥에 몬스터를 하나 사고
편의점 앞 벤치에 앉아 천천히 먹는다.


몬스터 대신 바나나우유를 샀어야 하는데.
나는 늘 꼭 ‘안 사야 할 때’ 몬스터를 산다.


졸릴 때 먹던 버릇으로 카페인이 잔뜩 든

몬스터를 생각 없이 들고 나왔다.


이제 집에 들어가도 되나?


언제 올지 모르는 언니를 기다려 보기로 한다.


우리 집에서 언니가 가장 세기 때문에

언니랑 같이 들어가면
엄마랑 오빠가 조심할 것이다.


언니가 집에 있을 때 싸우면 언니가 더 난리다.
오늘은 언니가 필요하다.


아파트 동 입구에서 왔다 갔다 한다.


저 멀리 언니의 모습이 보였을 때
나는 우연히 만난 척 언니랑 엘리베이터를 탔다.


평소처럼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곁눈으로 언니를 살피니

오늘도 기분이 나빠 보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20 발자국을 걷는다.


띠띠띠. 띠띠띠. 띠리링~


“엄마!”


언니는 큰소리로 엄마를 부른다.


언니는 언제나 엄마만 보면 불만 얼굴이 된다.
엄마를 생각만 하면 자동 탑재되는 것 같다.


언니는 오빠가 하는 건 다 하고 싶어 한다.
오빠처럼 잘하지도 못하면서.


그러고 나서는 엄마 잘못이라고 화풀이를 한다.
오빠한테만 신경 쓴다고,
오빠처럼 머리 좋게 태어나지 못했다고,
엄마가 오빠만 좋아한다고.

그러면서 눈을 깜빡이는 틱도 점점 심해졌다.


그런데 오늘은 그러면 안 될 텐데.
엄마가 컨디션이 나쁠 텐데.


나만 또 눈치 보게 생겼다.


엄마가 안방에서 나온다.


긴 머리에 집게핀을 꽂으며 살짝 비틀거린다.
눈에는 초점이 없다.


대학 다닐 때 엄마는 축제에서 메이퀸이었다는데

믿어지지가 않는다.


얼굴은 메마르고 머리는 푸석하고
손은 건조하고 발은 살보다 뼈가 더 많이 보인다.


“엄마, 국어 하나 틀려서 1등급 날아갔어.

수행에서 2점 깎인 것 때문이야.

학원선생님이 알려 준 대로 썼는데 아니래.

당장 학원 바꿔 줘.”

언니는 눈을 빠르게 깜빡인다.


엄마 눈의 초점이 억지로 돌아온다.

엄마는 전화기를 들었다가 잠깐 멈춘다.
손끝이 떨린다.
엄마는 한 번 눈을 감는다.

미간에 주름이 깊이 잡힌다.


“잠깐만. 엄마가 전화해 볼게.”


아휴.


언니는 또 엄마에게 쓸데없는 일을 시킨다.


엄마가 학원선생님에게 따지고

학교선생님한테 구걸하는 걸 다 듣고 나서야
엄마 괴롭히기를 멈춘다.


편의점에서 많이 먹고 오길 잘했다.
오늘 마라탕은 없는 것이다.


근데 오빠는 나갔나?


언니랑 엄마가 싸우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조용히 내 방으로 들어간다.


문 밖에서 계속 들리는

소리소리소리….


“지난번 학원 그냥 다니면 좋았잖아.”


“그 학원은 우리 학교 수행을 못 맞춰 준다니까.”


“엄마가 이 학원에서 서울대 많이 보낸다고 했잖아.”


“그럼 뭐 해. 나는 2점 깎였는데.”


“지필 다 맞았으면 좋았잖아.”


“지필 다 맞아도 1등급 안 나올지도 몰라.
지필 다 맞은 애가 우리 반에서만 두 명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엄마가…

네가…

엄마 때문에…

너는….


이어폰을 꽂는다.

오빠들 노래를 플레이한다.


내 주변의 검은 천과 높은 담들 이 없어지고
오빠들의 가벼운 발걸음이 나에게 다가온다.

무대 위에 나도 올라가 같이 춤을 춘다.


띠띠띠. 띠띠띠. 띠리링~


잠결에 도어록 소리가 들린다.

아빠인가?

나는 얼른 이불을 걷어차고 방문을 열고 뛰어나간다.


“아빠—!”

아빠한테 달려가 안긴다.


술 냄새.
담배 냄새.
퀴퀴한 냄새.
아빠 냄새.

아빠 손에는 어김없이 나를 위한

페레로로쉐가 들려 있다.


아빠는 매일 피곤하다.

일 하고,

술 먹고,

늦게 오고,

엄마를 피하고,

오빠와 언니는 멀리서 보고,

나만 가까이서 본다.


오늘도 엄마를 잘 피해야 할 텐데.


“우리 막내 잘 지냈어?

아빠가 초콜릿 사 왔지. 맛있게 먹어.”

“또 술 먹었지? 아까 전화도 안 받고.
엄마랑 오빠랑 또 싸웠어. 언니랑도.”

“그랬어? 신경 쓰지 말고 자.
아빠 들어간다.”


오빠 방과 언니 방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다.

지금이 몇 시지?

거실의 전자시계는 새벽 2시 40분이라고 알려 준다.


안방 문이 열리고 문틈으로

불빛이 한 가닥 새어 나온다.

불빛과 함께
엄마의 힘들고 날카로운 목소리,
아빠의 고단한 목소리가 만난다.


둘이 엄청 좋아해서 결혼했다더니
다 뻥인 것 같다.


더 자야지.



“일어나. 학교 가야지.”

어제는 아무 일이 없던 것처럼
평소와 같은 톤의 엄마 목소리다.


헉. 벌써 아침이다.


영어 독해를 하고 자야 했는데 큰일 났다.
오빠 언니 때문에 깜빡했다.


아— 학교 가기 싫다.


나는 공부가 싫다. 재미가 없다.


학교에 가면 친구들 만나는 것만 좋다.


그래서 수업 시간엔 아무 생각도 안 하거나
오빠들 생각을 한다.

그래도 시간이 안 가면 잔다.


잠도 안 오면 수업 중에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손을 든다.
그리고 종 칠 때까지 탈의실에 있는다.


혼자 누워서 작은 창밖의 하늘을 볼 수 있는 탈의실이 좋다.


층마다 있는 탈의실은 수업 중엔 항상 비어 있다.


집에선

내 방에서,


학교에선

탈의실에서


나는 숨을 쉰다.


오빠는 식탁에서 핸드폰을 보며 밥을 먹고
언니는 자기 방에서 머리를 말리고 있다.


나도 식탁에 앉는다.


아빠는 안방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고
엄마는 싱크대 앞에서 이것저것 하느라 바쁘다.

드라이어 소리, 싱크대 물소리, 샤워하는 소리로
집 안이 시끄럽다.


이어폰을 끼려고 내 핸드폰을 찾고 있는데
식탁에 진동이 느껴진다.


엄마 핸드폰인 것 같다.


핸드폰을 얼핏 보니 문자 알림이 있고
액정에 ‘예린이 어머님’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나?


우리 담임?


헉.


엄마 핸드폰을 슬쩍 집어 내 방으로 가져간다.


오빠가 나를 본다.

오빠 눈빛이 말한다.
‘야. 지금 그거 뭐야?’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엄마 핸드폰을 들고 식탁에서 일어났다.

안방 문을 닫고 침대 위에 엄마 핸드폰을 올려놓는다.

핸드폰 화면에는 문자가 떠 있다.


'예린이 어머님, 학교에 좀 오셔야 할 것 같아요….'


엄마 핸드폰을 다시 집어 내 방으로 가져간다.

오빠가 나를 본다.
나는 고개를 숙인다.
오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밥을 먹는다.

핸드폰을 열어 문자 내용을 읽는 순간, 숨이 턱 막힌다.


'예린이와 관련하여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예린이가 학교 탈의실에서

담배를 피운 정황이 있습니다.

어머님께서 학교에 좀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멈췄다가 정신을 차린다.

엄마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는다
나는 그대로 가방을 메고

살금살금 집을 나온다.


오빠 학교를 지나고, 내 학교 앞이다.


교복을 엉성하게 입은 친구들이
먼지처럼 학교로 빨려 들어간다.


나는 돌멩이처럼 서 있다.


지금 학교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친구들이 모두 들어갔다.


학교 앞엔 나만 남았다.


나는
학교를 지나간다.


횡단보도를 건너 한참을 걷는다.
옆동네를 지나 그 옆 동네를 지나,

계속 걷는다.


어디인지 모르겠는 동네가 나왔다.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는다.

꺼 놨던 핸드폰을 켠다.

담임선생님에게서 문자가 와 있다.
학교로 오라고 한다.


엄마 핸드폰도 켠다.

핸드폰을 켜자마자 문자가 쏟아진다.


[의대 합격전략 연구소]
“고3 겨울방학, 하루 14시간 몰입 프로그램 마감 임박”


[학부모 공지방]

“수시 최저 충족률 관련 설명회 신청 링크 안내”


[아임 입시전략센터]
“오늘 상담 취소 시 불이익 있습니다.”


[진학부]
“학부모 상담 일정 재확인 바랍니다.”


이번엔 내 핸드폰이 울린다.

아빠 문자다.


예린아. 아빠야.
엄마랑 학교 다녀왔고 선생님이 너 빨리 오래.

교내 봉사 10시간이래.
그리고 엄마 아빠는 잠깐 여행 다녀오기로 했어.
언니 오빠랑 3일 잘 지낼 수 있지?


어! 이게 뭐지?


나 대학 못 가는 거 아니었어?

엄마가 설명회를 안 가고 여행을 간다고?


나는 믿기지 않았다.

나 돌아오라고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닐까.


나는 천천히 일어난다.

그래도 해결이 된 건가?

오늘 학교로 돌아가긴 싫어서

우선 집으로 가기로 한다.


띠띠띠. 띠띠띠. 띠리링~


집안엔 아무도 없다.

엄마 핸드폰을 안방에 올려놓는다.

언니가 와 있다.


“중학생이 담배나 피고.”


“언니가 무슨 상관이야.”


우리는 싸우다 만다.
오늘은 서로 싸울 마음이 아니다.


오빠가 들어온다.

“밥 뭐 먹지.”


언니가 말한다.

“나 마라탕.”


오빠가 말한다.

“꿔바로우도.”


내가 말한다.

“꽃빵 튀김도. 볶음밥도. 복숭아 차파이도.”


어제 먹고 싶었던 마라탕이 오늘 도착했다.


비닐봉지가 바스락거리고,
마라탕 냄새가 집안에 피어오른다.
식탁 위에 그릇들이 하나씩 놓인다.


그런데도 집은 조용하다.


조용한데, 무섭지 않다.


오늘은 우리 집의 모든 문이 열려 있다.


집이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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