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혼자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
발목이 부러졌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걱정은
6개월 전부터 준비한
가족 여행이었다.
우리는 오사카와 교토로 떠날 예정이었다.
발단은 남편의 교토 마라톤이었다.
작년에 남편이 오사카 마라톤에 참가한다는 핑계로
오사카 여행을 다녀왔다.
그래서 올해는 내가 남편을 부추겼다.
“교토 마라톤도 신청해.”
남편은 정말로 신청했고,
우리는 6개월 전부터 여행을 계획했다.
세 달 전쯤, 가족이 함께 밥을 먹다가 여행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자 두 아이가 동시에 말했다.
“우리도 같이 가면 안 돼?”
대학생이 되고 보니
돈 걱정 없는 해외여행이 꽤 괜찮은 일이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우리는 종종 해외여행을 했다.
가까운 나라로 3일에서 일주일 정도 다녀오기도 했고
영국과 싱가포르에서는 한 달씩 살아보기도 했다.
그때는 그저 아이들에게
낯선 환경을 두려워하지 않는
경험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쉽지는 않았다.
남편과 함께 떠나는 짧은 여행도,
남편 없이 아이들과 하는 한 달 살기도.
두 아이의 손을 잡고 배낭을 메고 길을 잃기 일쑤였고
여행하면서 생활까지 해야 했기 때문에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여행 계획까지 세워야 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어떤 날은 너무 고되고 버거워
늦은 밤 맥주를 앞에 두고
여행을 괜히 시작했나
후회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 덕분인지 아이들은
내가 바라던 방향으로
잘 자라 주었다.
그리고 이제는
각자 따로 해외여행을 다닐 만큼 커 버렸다.
그런데.
두 달 전
내 발목이 부러졌다.
이런.
이번 여행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휠체어를 타고 여행을 가기로 결정했다.
지금 생각하면
하지 말았어야 했다.
비행기는 새벽 6시 출발이었다.
건강했던 세 달 전의 나는
조금이라도 더 빨리 도착해서
여행을 알차게 즐기고 싶었다.
하지만 발목 수술 후
휠체어를 타고 집 안에서만 지내던 나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소화불량과 불면증이 생겼고
배는 늘 묵직했다.
앉거나 일어날 때
어지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비행기를 타고
30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갑자기
배가 심하게 아프기 시작했다.
위경련처럼 배가 뒤틀렸지만
아프다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가족들은 발목 통증이 심해진 줄 알고 놀랐다.
하지만 비행기 안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다행히
30분 정도 지나자 통증이 조금 가라앉았다.
오사카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 정도 진정된 상태였다.
하지만 배는 여전히 묵직했고
점점 딱딱해지는 느낌이 있었다.
그래도 가족들을 더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괜찮은 척하며 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밤이 되자
배는 더 불러오고 단단해졌고
통증도 점점 심해졌다.
나는 일본 약국에서 사 온 위경련 약을 먹고
또 괜찮은 척했다.
다음 날.
남편과 큰아이는 계획대로
오사카성에 가기로 했다.
나는 컨디션이 좋지 않다며
숙소에 남겠다고 했다.
둘째 아이는
나를 혼자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자기도 남겠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통증이 급격히 심해졌다.
둘째 아이가 말했다.
“엄마, 병원 가야 해.”
첫 번째 병원에서는
나를 보더니 바로 말했다.
“큰 병원으로 가셔야 합니다.”
두 번째 병원에서는
CT 촬영, 엑스레이, 피검사, 소변검사까지
대대적인 검사가 이어졌다.
염증 수치와 백혈구 수치가 너무 높아
당장 입원을 해야 할 정도라고 했다.
다행히
맹장이 터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의사는 말했다.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다가
장에 천공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단호하게 덧붙였다.
“교토 여행은 절대 안 됩니다.”
병원에서 항생제와 수액을 맞고
염증 수치가 조금 내려갔다.
다음 날
남편과 함께 이른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국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다행히
모든 것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이제는 절뚝거리지만 걸을 수 있고
죽이 아닌 음식도 조금씩 먹을 수 있다.
큰아이는
이번 방학을 거의 밥을 하며 보냈다.
아침에 일어나면
전날 쌓인 설거지를 하고
“엄마 오늘 뭐 먹고 싶어?”
하고 묻고는
부엌에서 밥을 했다.
둘째 아이는
이번 여행에서 나를 살렸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일본에서 살다 온 친구와 짝이 되었는데
그 친구의 한국어를 도와주다가
오히려 일본어를 배우게 되었다.
그 덕분에
일본 병원에서
의사와 원활하게 소통하며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남편은
내가 아픈 두 달 동안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걸을 때도
앉을 때도
단 한순간도
나를 돌보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나는 이제 안다.
해외여행에서
내가 짐을 들지 않아도 된다는 것.
외국어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집에서
밥을 나누어 할 수 있고
집안일을 나누어 할 수 있다는 것.
아이들은 어느새 자랐고
나는 이제 혼자 애쓰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나는
이제 글을 쓴다.
이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