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게 우리 집엔 차가 넘친다. 친구 J가 중국에서 사 온 버마차, 시누이가 일본에서 사 온 가루녹차와 보이차, 남편이 빙어 축제에서 지역 상품권과 맞바꾼 오미자차, 남동생이 사 온 장미차와 유리 다기 세트까지... 내 취미가 다도라고 한 적도 없건만 지인들은 여행을 다녀올 때면 부지런히 손에 차를 들고 돌아오곤 했다. 그래서 우리 집 주방 찬장 한 켠은 차로 가득하다. 여기에 내가 따로 구매한 커피 대용 페퍼민트 티와 감기 예방용 도라지차까지 더하면 찬장이 터질 지경이니, 이쯤 되면 다도가 취미가 아니라고 하기에도 민망하다. 그러니 '차 수집이 취미' 정도로 합의하자.
어쨌든, 차가 많으니-이게 차(車)였다면 참 행복할 텐데!- 부지런히 마셔 없애야 하는데, 이 집에는 나보다 더 게으른 인간이 셋이나 되어 모든 처분은 내 차지가 될 수밖에 없다. 눈 떠서 마시고, 밥 먹고 마시고, 입이 심심할 때 마시고. 티백에 우려 마시고, 오리 모양의 인퓨저를 띄워 마시고, 거름망이 달린 티팟에 우려 마시고... 붕어처럼 마시고 마셔도 차는 줄지 않아 아득하던 중, 또 하나의 차 선물이 들어왔다. 바로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티(English breakfast tea)! 남편의 사촌이 영국 여행을 다녀온 기념으로 선물한 홍차 티백인데 어찌나 야무지게 눌러 담았는지 근 반년을 마시고 마셔도 줄어드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러다 잠시 우리 집의 차들을 외면하고 시판 밀크티로 본의 아니게 외도(?)를 한 적이 있다. 한참 커피를 끊으려던 즈음에 흑당 밀크티 유행을 타고, 마트에서도 흑당 밀크티를 팔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오후 두 시쯤 나른함이 몰려오면 회사 일층에 있는 슈퍼로 내려가 다디단 밀크티를 하나씩 지르곤 했다. 얼마나 달던지, 카페인 없이도 한 모금이면 잠이 확 깰 정도였다. 그렇게 나는 커피 대용으로 마시던 시판 밀크티를 하루에 한 번 마시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러던 어느 휴일, 찬장을 열다 검은 오오라를 내뿜는 홍차 티백을 발견했다. 저걸 어떻게 처리한담... 커피 대용으로 마시기엔 각성 효과도 그닥 별로고, 시큼털털한 맛도 입맛에 맞지않아 곧 버리게 될 것 같았다. 그러다 갑자기 밀크티의 원료가 홍차라는 -어쩌면 당연한- 생각이 들었다. 따뜻한 물에 차를 우리고, 우유를 붓고, 설탕을 더하니 맛이 그럴듯했다. 그러다 욕심이 나 밀크티 믹스를 사서 차를 우리고, 설탕과 티믹스를 녹여, 우유를 붓고 전자레인지에 돌리기까지 하니, 와! 홍*이젠에서 사 먹었던 밀크티같은 맛이 났다.
흠, 믹스커피 대신 밀크티라, 좀 고급져 뵈는데?라는 자의식 과잉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나 곧 나 같은 방식으로 우유와 설탕을 잔뜩 넣어 마시는 걸 노동자의 차(builder's tea)라고 부른다는 말에 자의식은 푸슈슉~ 비웃음만 남기고 사라졌다.
그렇게 부지런히 하루에 두세 잔씩 밀크티를 소진해도 우유만 줄고 티백은 여전히 남아있다. 도대체 이 티백은 언제 없어지는 건지 불가사의하다. 바쁜 점심을 보낼 때면 밥 대신 속을 채우고 잠을 깨우는 밀크티는 이제 내 일상에서 떼놓을 수 없는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