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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e Apr 05. 2020

현재의 분노를 넘어 가야할 곳은,

 다들 힘든가 봅니다. 

 인터넷을 보다 보면, 아니 멀리 가지 않고 당장 주변의 말만 들어도 다들 날이 서 있다는 게 피부로 느껴집니다. 특정인, 특정 지역, 특정 정당. 앞 문장을 보며 떠오르는 그곳을 가리키는 손가락질이 점점 격해지고 있습니다. 너 때문이야, 너만 아니면, 너 때문에 내가... 자신이 절대 속하지 않으리라 믿는 그곳을 향해 이 모든 불편함의 원망을 돌리고 있죠. 언젠가 읽었던 '비난은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기 위한 비명'이라는 구절이 떠오르는 요즘입니다. 왕따 주동자가 사실 왕따를 당할까 제일 두려워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과 비슷한 뜻이겠지요. 


 이렇게 초월한 듯 이야기해도 사실 저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나는 아니야. 나는 그 지역에 살지만 집에 곱게 있었고, 마스크를 양보했고, 시장이 무능하다는 걸 알아. 나는 여기에 산다고 싸잡아 욕먹을 이유가 없어."라는 어느 게시판의 호소글을 보며 이기적이게도 안쓰럽기보다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사람들의 비난 섞인 눈길이 '맘충'에서 그곳으로 옮겨 간 것 같으니까. 더욱이 지금은 풀타임 육아가 몇 달째 이어오고 있으니, 남 걱정은 사치 같아 보였습니다. 확진자가 너무 많이 나온 게 사실이니까. '요즘 시대 엄마들이 개념을 밥 말아먹었다'는 말이 비슷한 프로세스로(대량의 케이스 발생> 인터넷 상의 회자> 혐오의 확정) 진실이 된 것처럼, 그쪽도 그런 과정을 거쳐 혐오의 프레임을 뒤집어쓰고 있으니까. '정의'보다는 '대세'가 '진실'이 되는 것을 수차례 목도해왔으니까.


 하지만 눈 가리고 아웅 한다고 그게 정의가 되지는 않음을 압니다. 총선을 앞두고 편 가르기가 횡횡한 요즘에 언론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선 안될 만큼 저는 조금 자랐습니다. 심지어 내가 지지하는 정당 또한 자신에게 유리한 혐오를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압니다. 카뮈의 <페스트>에서 전염병이 창궐하는 와중에 폭리를 취하는 자가 있었던 것처럼. 혼란 중의 불안한 심리를 이용해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이가 있겠죠.


 그렇다고 귀를 막고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정보 하나의 차이가 생명과 직결될 수도 있으니까요. 우리는 어쩌면 <페스트>의 인물들에게서 힌트를 얻을 수도 있겠습니다. 또한 유발 하라리의 인터뷰에서도요.

https://newspeppermint.com/2020/03/22/yuvalhararioncovid19/


 연대. 

 이는 막연히 인간성에 대한 찬양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최선을 다해줄 거라는 신뢰에서 기인합니다. 우리의 의지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전염병의 습격에서, 자가격리하지 않고 퍼트리는 타인에게 분노라는 형태로 불안을 전가할 수 있겠으나 대다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믿고 싶습니다. 성선설이 비록 유행에 뒤떨어졌다 하더라도 대다수는 나와 남을 배려하며 우리 모두가 답답한 현재를 버티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분노와 혐오가 나를 집어삼킨 대도 그 대상 또한 절대악은 아닌 그저 평범한 인간임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서로가 연대하고 이 시기를 버틸 때, 우리 사회는 비교적 적은 외상에서 회복할 수 있음을...



Photo (c) by Omar Lopez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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