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내가 5살 때 부산역에서 울었던 게 첫 번째 가출에서 돌아온 이유라고 말했다. 그 말 속에는 너 때문에 거지 같은 결혼 생활을 지속했다는 함의가 있었다.
몇 년 전, 자주 가던 커뮤니티의 한 게시판이 뜨악한 게시물로 채워진 적이 있다. ‘가난한 사람하고 사귀면 안 돼요. 낮은 자존감에 찌들어 있거든요’, ‘~하는 사람은 무조건 거르세요.’, 운운. 이게 무슨 일인가 지켜보던 중, 심장이 내려앉는 게시물을 보았다.
“화목하지 못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과 결혼하면 안 돼요. 결혼 전에 집안 분위기 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더라고요.”
그런 사람은 부모를 닮아, 심리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요지였다. 그 말에 격분해 떨리는 손으로 그게 왜 몰상식한 말인지 따지는 항의 글을 올렸더랬다.
요새는 열린 공간에서 결손가정에 대한 편견을 이야기하면 욕을 먹겠지만, ‘내 아이가 결손가정에서 자란 사람과 결혼한다면 말리겠다.’는 인식은 사라지지 않았다. 남 얘기를 좋아하고, 비교가 일상인 사회에서 ‘정상 가정’이라는 기준을 이탈한 사람을 쉽게 포용할 리가 없으리라.
솔직히 얘기하자면, 우리 집은 콩가루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다사다난한 세월을 보냈다. 부모님의 이혼만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 간 갈등은 현재까지도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뿔뿔히 흩어진 우리 가족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영원히 ‘정상 가정’ 범주에 속하지 못할 것이다.
그 한가운데 엄마와의 케케묵은 갈등이 있다. 17살에 두 분이 갈라선 후, 아버지 쪽으로 가게 되었다. 다행히 지속된 연락으로 엄마와의 인연은 끊기지 않았다. 그러나 보이지 않은 생채기를 덮어놓고 억지로 이은 관계는 삐걱거렸고, 결국엔 파탄이 났다.
생각해보면, ‘보통 엄마’에 대한 환상이 나도 모르게 존재했던 것 같다. 엄마라면 응당 다정히 아이를 보살펴주고, 힘들 땐 응원해주는 분이라는 환상 말이다. 엄마는 그런 부류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플 땐 걱정해주기보다 몸 관리를 못했다며 화를 냈고, 힘들다고 토로하면 “네가 하루 12시간 일하는 나보다 힘드냐”며 일축하는 걸 위로라고 말씀하던 분이었다. 우리 사이에는 이해와 사랑보다 강요된 위계만이 존재했다.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지만 어쩌다 타인과의 대화에서 엄마 이야기가 나올 때면 반응은 대부분 비슷했다.
"그래도 어머니잖아. 잘 풀어야지."
친척도, 친구도, 남편도, 심지어 심리상담사도 같은 대답을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그러나 노력해도 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걸, 어떤 관계는 놓아야 한다는 걸 모녀관계를 통해 먼저 배웠다. 나는 가족에 관한 이야기에 침묵해야 했다.
http://www.yonhapnewstv.co.kr/MYH20190330002000038/?did=1947m
https://www.ytn.co.kr/_ln/0115_201903181513450238
한해 142건의 신생아 유기가 일어나고 있다. 아동학대 사건도 끊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러한 불편한 비극을 다른 세상 이야기쯤으로 치부하며 자신의 세계와 구분 지으려 한다. 하지만 실제 가정은 완벽한 흑백처럼 ‘정상 가정’과 ‘문제 가정’으로 나뉘지 않는다. 오히려 둘이 미묘하게 섞인 회색빛으로 이웃과 우리 가정에 존재한다.
사이좋은 부모님과 그들을 존경하는 자녀로 구성된 화목한 ‘정상 가정’. 그것은 신화이고, 누구도 남에게 강요할 권리는 없다. 깨진 가정도 가정의 한 형태이고, 정상 가정을 추구해야하는 불완전함이 아닌 온전함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나는 부산에 내려가 엄마 앞에서 엉엉 울었다던 5살 겨울의 행동을 후회한다. 그때 울지 않았다면 우리 가족은 깨진 채로, 지금보다 비교적 얌전한 적의를 품고, 서로를 그리워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선 엄마가 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