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나는 꼭 죽어야 했다. 언제인지 명확하지 않은 십몇 년 전 어느 날, 기억 나지 않는 이유로, 죽기로 결심하고 여의도행 108번 버스에 올라탔다-아마 그날도 엄마와 대판 싸웠던 날이라 짐작할 뿐이다-. 여름이었으나 반팔 아래 스치는 에어컨 바람이 쌀쌀한 밤, 세상 모든 슬픔을 다 떠안은 양, 끝도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버스 등받이 말고는 기댈 곳이 없었고, 미래는 창밖처럼 암울했다.
드문드문 앉은 승객을 태우고 한참을 달리던 버스, 그럼 이제 아디오스. 그런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자리가 불편하다. 음? 벨트를 깔고 앉았던가? 옆자리로 옮겼다. 그래도 이상한데?? 엉덩이 쪽으로 손을 가져가보니 손가락인지 발가락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꿈틀대며 황급히 좌석 틈새로 빠져나갔다. 이런 신박한 변태를 봤나.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아, 그게…”
“지금 뭐하시는 거냐고요!!!”
유난히 얼굴이 까맣고 말랐던 그는, 몇 마디 중얼거리다 다음 정류장에서 후다닥 달아나 버렸다.
잠시 슬픔의 맥이 끊겼지만, 목적지인 한강까지 가기 위해 여의나루에 도착했다. 나는 꼭 죽어야 하니까. 이젠 정말 끝이다! 빌어먹을 세상아, 아디오스!
그러나 한 여름밤의 한강엔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 넓은 강변에 으슥한 곳이 한 군데도 없을 만큼, 데이트 족이며, 피서 나온 가족들이 바글바글했다.
허탈감에 눈물은 쏙 들어가고,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는 중,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저.. 안녕하세요?”
평상시 같으면 ‘도를 아십니까’ 쯤으로 생각하고 무시했을 테지만, 상황이 상황인 데다, 그분의 외모가 무시할 수 없게 했다. 잘 생긴 게 아니라-누구라고 언급하긴 그렇지만-전 대통령과 형제라고 주장해도 믿을 수 있을만큼 닮은 얼굴이었다.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혹시…?”
“제가 좀 많이 닮았죠? 하하”
서울 외곽 어디에선가 사업을 하시는 분이라 했다-그리고 당연히 연세도, 가족도 있으신 분이었다- 사뭇 점잖은 태도로 명함을 건네며 친구가 되자고 했다-적어도 20년 이상 나이 차이가 나 보이는데, 그 버스가 미국행 버스였던 건지 잠시 혼동이 왔다-. 그분의 자유로운 연애 이야기, 딸 이야기를 들으며 어깨에 들러붙어 있던 죽음이라는 유령이 서서히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 후 멀쩡히 집으로 돌아와 현재는 딸 둘, 남편과 지지고 볶으며 잘 살고 있다.
애초에 죽을 생각으로 버스에 올라탔던 게 문제였을까? 인생에 개입하는 어떤 존재가 있었던 걸까? 알 수 없는 이유로 살아남아, 알 수 없는 이유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아직 기대수명의 반도 채우지 못했지만, 삶이란 정말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다. 당장 내일도 말이다. 당시 이 이야기가 안주거리가 된다는 걸 상상이나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