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 만날 수 있을까?
지난 주말, 길거리 한쪽 매대에 빨갛게 고개를 내밀고 있는 카네이션을 보며 깨달았습니다.
아, 어버이날이구나.
10년 전이라면 카네이션 바구니 두 개와 용돈 봉투 두 개를 챙겨 “뭘 이런 걸 챙기냐.”는 핀잔을 두 번 들었겠지요-엄마가 저기압일 때는 “돈도 없는데 그 인간 챙기지 마”도 곁들여-. 이번 어버이날은 카네이션이 없습니다. 시댁 식구 일정에 맞춰 4월 말에 가느라 카네이션은 생략되었죠. 용돈 봉투만 재빨리 허리춤에 찔러 드리는 게 전부였습니다.
가족 행사 일정에 엄마 방문이 없어진지는 몇 년 됐습니다. 이전 글에서도 언급한 적 있지만 부모님 이혼 후 갈라진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회복 중이라기보단 멀어지는 중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습니다- 제 이기적인 기억이 친정 엄마를 절대악으로 만들었지만, 그녀도 보통사람이었습니다. 어떨 때는 다정다감했고, 어떨 때는 가혹했던. 주변 상황이 그녀를 더더욱 가혹하게 변하도록 몰아붙였다는 게 문제였지요.
초등학교 때의 엄마는 쾌활하셨습니다. 시장에서 동향의 사람을 만나면 활짝 웃으며 찐한 부산 사투리로 대화하곤 하셨습니다. 사교성도 좋아 통장을 하기도 하셨죠. 하루 종일 봉투를 붙여 전집을 사주실 만큼 자식 교육도 열정적이셨고요.-후에 공부를 좀 한다는 소리를 들은 것도 엄마 덕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엄마는 우울한 피해자였습니다. 무능력한 아빠 덕에 생활비가 없어 식당일을 시작했을 때, 데리고 간 남동생이 공부도 안 하고 게임에 빠졌을 때, 이혼했던 아빠와 재회 후 이런저런 문제가 다시 생겼을 때, 엄마는 자신을 끊임없이 불행하게 만드는 주변 인물을 원망하셨습니다. 그리고 대상에게 닿지 못한 원망을 가장 가까운 맏딸에게 풀어내셨습니다.-아마 외부에 집안 욕을 하기는 남사스러우셨겠지요-
중학생이 될 때까지 아빠는 세상에서 제일 나쁜 인간인 줄 알았습니다. 아빠에게 물려받은 제 피와, 제 성이 저주스러웠습니다. 할 수 있다면 모두 빼내 새 피로 수혈받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머리가 굵어지자 판단이 생겼습니다. '아, 두 분이 안 맞는 거구나. 아빠가 마냥 악인은 아니었구나.' 나도 저주받은 집안 사람은 아니구나. 맏딸이 대나무 숲의 역할을 거부하자 결국 엄마는 "너도 아빠랑 똑같다."며 저주같은 말을 남기고 연락을 끊으셨습니다.
엄마.
아이들이 저를 부르는 이름. 그리고 한때 울며 불렀던 이름. 이젠 불러도 답이 없는 이름.
얼마나 지나면 엄마를 이해하게 될까요?
얼마나 지나면 엄마는 이해할 수 있을까요?
서로의 목소리만 높이는 대척점에서 아마 불가능한 소망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