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까지도 갈까 말까, 괜히 수원까지 가 시간만 버리는 것 아닌가 고민했습니다. 머리가 아파 슬쩍 남편에게선택권을 넘겨 봤습니다.
그냥 안 할까?
-그래도 한 번 해봐.
발표도 젬병이고 내용도 날림인 걸?
-가, 가, 나도 셔터맨 되는 상상이라도 해보자!
그의 응원인 듯 아닌듯한 말에 등 떠밀리듯 마음을 먹었습니다.
돌봄 선생님께 아이들 등원을 맡기고 7시 반에 부랴부랴 집을 나섰습니다. 수원까지 가는 길은 어찌나 길던지요. 간밤에 몇 시간 채 자지 못했음에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그냥 가볍게 시도해본 거라고 생각했는데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나 봅니다- 이때다 싶어 부실한 발표자료를 계속 보강하다 보니 어느새 수원에 도착했습니다.
발표장에 먼저 도착해 준비를 하고 있는 팀 중에는 이미 사업체를 운영하는 게 아닐까 싶은 연륜 있는 팀도 보였습니다. 저분들은 정말 프로일 텐데... 괜히 기가 죽었지만 거기까지와 포기할 순 없었죠. 태어나 처음으로 '대표님'이라는 어색한 호칭을 들으며 대기실로 안내되었습니다. 발표를 어떻게 하지...? 눌변을 커버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육아 경험과 글쓰기로 익힌스토리텔링뿐이었습니다. 계속 수정하며 어떻게든(?) 말이 되게 풀어봤지만, 제출한 ppt가 워낙 부실했던 터라 마음을 비우고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발표 시작.-사실 이때부터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떨리는 손을 움켜쥐고 발표를 시작했습니다.
-제가 제안하려는 서비스는.... 블라블라
멘탈이 가출한 발표를 마친 후, 소비 트렌드와 서비스 세분화까지 여러 핵심을 꿰뚫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다행히 육아 관련 서비스였기에 경험이 자산이 되어-경력에 육아 5년 차라고 당당히 기재할 날이 이렇게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이죠- 큰 막힘없이 답변할 수 있었습니다. 교수님의 끝맺음 멘트는,
-아이디어는 좋은데, 예산 계획에서 미숙함이 드러나네요.
-네, 소심해서 견적을 작게 잡았어요. 제일 걱정했던 게 발목을 잡네요, 흑-
남편 말이 맞았습니다. 오길 잘했습니다. 통과 가능성은 없지만 쉽게 얻을 수 없는 값진 경험을 했으니까요.-제가 언제 '대표님'이라는 호칭을 또 듣게 될까요- 이렇게 글 소재도 얻었고요.
몇 달 전 남편에게 아이디어에 관해 이야기할 땐, 반은 농담이었습니다. 얼마 전 갔던 스타트업 모임에서도 '누가 나 좀 말려줘!' 하는 심정으로 갔던 거고요. 거기서 얻은 지원 사업 정보로 제 아이디어를 타인 앞에서 설명하고 설득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계속 겁을 상실하고 도전하면 또 어떤 사건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사뭇 기대가 됩니다.
-덧, 광탈했습니다ㅋ 한 달 뒤, 착실히 준비해서 여성창업경진대회를 노려볼 생각입니다. 아줌마의 끈기가 열매를 맺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