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SKY캐슬의 가부장적 아버지 캐릭터, 차민혁은 아내와 아이들이 가출한 후 거실에 쭈그려 앉아 컵라면을 먹는다. 면을 곱씹을수록 차오르는 분을 못 이기겠는지 거실 한 가운데 자리 잡은 피라미드에 라면을 내동댕이친다. 그리고 시뻘게진 얼굴로 한참을 노려보다 부들거리는 손으로 물티슈를 꺼내 라면 찌꺼기를 닦아낸다. 보통의 삶도 이렇다. 아내의 가출 같은 굵직한 사건. 그리고 뒤에 가린 라면을 닦아내야 하는 자질구레한 일상. 그 둘의 혼합.
3달 전도 그랬다. 크게 보면 정시 출퇴근하는 운 좋은 워킹맘이었지만, 업무와 육아에서 비롯된 자질구레한 것들이 모여 상당한 무게로 어깨를 짓눌렀다. 다른 일하는 엄마들과 별다를 건 없었지만, 그 흔하다는 것이 꼭 쉽다는 걸 의미하진 않았다.
아침부터 첫째는 어린이집에 들어가기 싫다고 떼를 썼다. 주말 내내 앓은 후유증이 남아서인지 그 날따라 실랑이가 길어졌다. 징징대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 들여보내느라 지각을 했다. 게다가 새벽에 구토한 둘째의 병원 진료를 남편에게 부탁했다가 싸움이 났다. 남편이 반차를 낼 차례라고 설명했으나, 전날 미리 얘기하지 않은 걸 짜증내는 말투가 '왜 애를 제대로 관리 못 해 아프게 만든거야?'라고 힐난하는 것만 같았다. 스트레스와 피곤이 몰려올 때는 단 커피를 수도 없이 들이부었다. 덕분에 밤에는 잠이 오지 않아 맥주를 마셔야 했고, 아침에는 또 빈속에 커피를 마셨다. 악순환이었다. 덕분에 위궤양과 임플란트를 서른다섯에 훈장마냥 얻었다.
업무 시간에는 굵직한 사건도 터졌다. 어느 밤 11시 해외바이어는 서류처리로 공항에 묶인 항공 화물을 빨리 처리해 달라며 장문의 항의 글을 단톡방에 남겼다-물론 보내기 전 그들이 전에 세관 업무를 해봤으니 받을 수 있다고 확답했다는 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점심을 30분 남기고 출근한 대표는 당장 해결하라며 2시간 연속 사이렌처럼 경보음을 울렸다.
일은 끝도 없이 터졌다. 하나를 정리하면 다른 하나가 불쑥 치고 들어오곤 했다. 항공사에 전화를 돌려 화물 문제를 해결하면 둘째 장염 소식이 들렸고, 일주일 동안 아이를 봐 줄 돌보미를 겨우 구하면 다른 일 진행은 어찌 되고 있느냐며 대표가 또 들들 볶는 식이었다. 앞서 언급한 드라마로 치면 가출과 라면 치우기의 무한 반복의 굴레에 빠진 것이다. 시뻘건 얼굴로 피라미드를 닦다 그걸 창밖으로 던져버릴 것 같았다.
당시 나는 날이 바짝 서 있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밀려오는 모든 일상 잡무가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한편으로는 미안함이 온몸에 배어 있었다. 아프지만 등원해야 하는 아이에게, 그런 아이를 맡겨야 하는 어린이집 선생님에게, 이사진이 가득한 단톡방에 항의하는 고객에게, 빈번한 휴가 때문에 눈치 보아야 하는 대표와 상사에게, 그래서 또 다른 휴가를 부탁해야 하는 남편에게 미안했고 미안해야만 했다. 그 미안함은 또 다른 일상의 형태로 괴롭혔다. 시시각각 넘실대는 부정적 감정과 일 더미에 떠내려가는 자신을 붙잡느라 일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아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
드라마 후반 차민혁이 애지중지 닦던 피라미드는 분리수거함에 들어갔고, 나는 현재 이직을 위하여 육아휴직을 낸상태이다. 워킹맘에도 전업맘에도 속하지 못하는 현재가 가끔 외롭다. 누군가는 남편 덕에 쉬어 좋겠다고 비아냥거리고, 누군가는 왜 또 아이들을 놔두고 아등바등 일을 찾느냐고 질문한다. 수많은 의무와 의문 속에서 나만의 길을 찾을 수 있기를, 그리하여 새로운 사건과 일상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