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ee Dec 13. 2019

방귀를 뀌는데 필요한 비용

"이 정도만 알아도 어디 가서 충분히 방귀 뀔 겁니다~"

누군가 단체 톡방에 도서 목록을 업로드한다. 프로이트, 융, 라캉... 이름만 들어봤을 뿐 나와는 1도 관계없다고 생각했던 이들이 성큼성큼 내게로 다가온다. 아, 안돼... 오지 마! 라고 거부해보지만 이미 늦었다. 내가 제 발로 걸어 들어간 모임이기 때문이다.


발단은 지난달부터 참여한 현대 미술 스터디 모임에서부터였다. 평소 가볍게 미술관 구경하는 걸 즐겼지만 의미에 관해선 하나도 모른 채, "해석은 관객에게 달린 거야!"라며 게으름을 합리화하던 나였다. 어느 날, 전시장에서 아이에게 조곤조곤 설명하며 대화 나누던 어떤 엄마가 부러웠다. 나도 아이에게 방귀를 뀌어보고(?) 싶었다. 글 소재도 슬슬 떨어져 가는 마당에 좋은 돌파구가 되지 않을까도 싶었고. 미술에 관해 쓰는 에세이라니!! 상상만 해도 멋질 것 같았다.


하지만 작품을 놓고 의미에 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눌 줄 알았던 내 기대는 첫날부터 완전히 어그러졌다. 이미 올해 일 월부터 시작한 스터디 구성원들의 감상은 단순히 예쁘다, 어떤 작품이 연상된다는 따위의 수준을 넘어서 있었다. 그들은 예술의 본질에 관해 진지하게 성찰하고 있었고, 더욱이 그것은 '미학'과 연결되어 있었다. 문제는 미학이 철학과 많은 부분 맞닿아 있다는 점이었다.  


작품 감상에도 벅찬 시간에 나는 철학을 공부해야 했다. 읽자마자 잠이 올 것 같은 서양 고대 철학이야 어찌어찌 오디오북으로 흘려들으며 넘겼지만 문제는 근현대 철학이었다. 이건 오디오북으로 들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훌쩍 넘어섰다. 이해는 둘째 치고, 한 시간을 들어도 머리에 남는 내용이 하나도 없었다. 마치 촘촘하지 못한 체처럼 무수한 단어들이 그저 나를 통과해 저 멀리 사라졌다.


퇴사도 했겠다, 날을 잡고 도서관을 뒤졌다. 하지만 서가 한 면을 가득 채운 철학 서적 더미가 나를 압도했다. 그 앞에서 그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칸트를 집으면 헤겔이 보이고, 소쉬르를 집으면 저 멀리서 후설이 "나는 안 데려가?"라며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라캉을 펼치면 아도르노, 사르트르, 메를로퐁티가 줄줄이 소시지처럼 걸어 나왔다. 회사를 관둔 후, 나는 마치 감옥에 갇힌 사람처럼 수감되어 독서라는 형벌을 수행해야 했다. 아마 내가 수능 공부를 할 당시 이렇게 공부했다면 서울대에 갔으리라.-하지만 이해는 한참 멀었으니 석방은 먼 훗날의 이야기가 될 터다-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은 미학이 아니라 나였다. 내가 잘하는 것이 두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도를 지나치는 것'이고, 다른 하나가 '우선순위 없이 닥치는 대로 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뭐든 빨리 빠져들고, 빨리 끝내고 싶었으나, 이 분야는 '대충'이라는 게 용납되지 않았다. 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찍어준 범위를 대충 외우기만 하면 점수 얻기는 쉬웠으나, 졸업 후 그런 지름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적어도 내가 선택한 공부는 정석대로 밀고 나가야 했고, 그건 철학뿐 아니라 글쓰기, 디자인 등 어느 분야에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똑똑한 척 방귀를 뀌는 건, 결코 쉽지 않다. 어린 시절에 잔머리로 좋은 점수를 받던 친구들이 모두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와 같으리라. 어른의 공부와 성과는 결코 잔머리가 통하지 않으니까. 그건 아이큐보다 인내의 문제에 가깝다. 그러오늘도 충실히 무언가를 파고들어야만 방귀까진 아니더라도 방귀 비슷한 무엇이라도 자랑할 수 있지 않을까.




Background photo (c) by Alex Block on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내 첫 책, 다섯 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