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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sHya Apr 21. 2024

집을 가지고 싶지 않다.

언젠가 살 집은 그때 생각하겠다.




어렸을 적 우리 집을 색으로 표현한다면 누르스름한 옛날 창호지 색이라고 할까?

조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그곳은 조용하고 고즈넉하고, 마당에 장독대들이 즐비하고 있는 곳이었다.

신실하신 분들이라 마당 한편에는 작은 별채가 있었는데 불상을 모셔놓은 향냄새가 그윽하니 

마당과 집안으로 늘 바람과 함께 솔솔 느껴졌다.

행복과 고통이 함께 공존했던 집으로 기억에 남는다. 

그곳에서 성장하는 동안 부모님과 살았던 기억은 아주 조금뿐이다.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고부갈등과 새어머니와 나 사이의 불편한 기류로 

(아버지와 나 사이를 질투했고, 이간질했다.) 결국 우리는 따로 살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삼촌이란 사람이 들어와서 살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지옥은 시작되었다. 

조카인 나를 향한 집착과 본인의 말을 듣지 않거나 하면 폭언과 폭력을 스스럼없이 행했었다. 

나는 그 집에서 나약하고 작은 존재로서 매번 나 자신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내려놓으며 폭력과 폭언을 수용하면서 버티고 있었다. 

내가 살던 시절은 종종 그런 집들이 있긴 했어도 이건 그 수위이상으로 

속수무책 당하고서는 아무 말 못 하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완벽한 양면성향을 보여주며 사람들 앞에서는 잘하는 척 뒤에서는 지옥 같은 악몽을 내게 안겨주었다.

나는 아직도 효자손이나 망치 그리고 빗자루 등등 집에서 흔히 사용하는 도구들을 볼 때면 마음이 떨려온다. 그리고 폭력과 폭언이 한 장면이라도 있는 영화나 드라마는 보지 않는다. 


서서히 자라나면서 삼촌의 금전적인 요구사항까지 합쳐지면서 

나는 죽어라 일만 하고 쓰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결혼 이후에는 단호히 거절하며 정리했지만 그들의 괴롭힘은 끝나지 않았다. 

협박하듯 도망치지 못하게 자리를 만들어 놓고선 나를 위하는 척하며

 


"이 집은 네 거야. 아버지가 받아야 하는데 지금 없으니 네가 받아야지."  


이런 상황을 만들어 놓고선 대출을 받아서 같이 살아가는 집이라며 

집에 쓸 돈을 마련한답시고 가져가서 사업하며 날려먹은 파렴치를 나는 아직도 달고 산다.

결혼 한 지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들은 그 돈을 갚고 있고, 나는 협박이라도 하듯 "갚으시라고요"라며 늘 대출금 내는 날이 다가오면 스트레스를 받으며 소리 지르고 있다.

집 명의를 넘겨 가라고 나는 몇 번이고 말했지만, 집 넘겨받을 형편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사업을 말아 드시는 바람에 그들은 나에게 빌어먹고 살고 있는 모양새다.

내가 왜 이 집을 가지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진절머리 나게 싫은 동네와 집을 나는 가질 이유가 전혀 없고 그런 개념 없는 인간들이 살고 있는 그곳에 공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온 몸에 피멍이 든 것처럼 내 몸 안에 독이 퍼지고 있었다.

제정신으로 살아남은 게 다행이라고 감사하다고 신께 기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주술처럼 외워댔던 ,



"나는 저런 상식밖의 인간들처럼 살지 말아야지."

나의 부모님을 생각하며 견뎌냈다.  


새어머니 잇슈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나의 아버지는 한 뱃속으로 낳은 자식이 맞냐 싶을 만큼 착하고 순수한 분이셨다. 삼촌은 그런 아버지를 질투하고 괴롭혔다. 

나의 아버지에 이어서 그의 자식인 나까지 괴롭히는 지저분한 인간을 나는 두 번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결국, 우리 아버지는 삼촌인 자신의 동생 빚도 갚아주고 비아냥 거리는 행동들을 받아주다가 스트레스로 암에 걸리셨었다. 나는 꿋꿋이 버텨냈다.

나의 한계를 넘어서는 인내심을 아마도 아주 어렸던 그때 경험했던 것 같다.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어질 나이가 되었고, 이제는 더 이상 봐줄 마음도 그러고 싶지 않아 

신경을 끄고 살려고 하고 있고, 언젠가 삼촌의 자식에게 집문제에 대해서 

논의할 날이 올 거라 생각하고 있다.



왜 지금 당장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처리하지 않느냐고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그들처럼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을 쏟아내고 사람을 굳이 괴롭히고 싶지 않기 때문인데, 

나의 인내심과 마음의 내려놓음이 하늘에 닿은 듯 삼촌이란 인간은 

지금 현재 파멸의 단계로 접어들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남편이 할머니의 장례식장에 대신 가주었는데 돌아와서 나에게 말했다.



"더 이상 두려워할 대상도 네가 아파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사람이라고 하기에 너무 망측할 정도로 얼굴이 뭉개져서 무너지고, 치아가 모두 빠지셨던데... 

술도 많이 먹고 그래서 그런 것 같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기다렸던 날이 코 앞에 다가와 있구나 싶었다.

내가 입 아프게 폭언하고 소송하거나 괴롭게 하지 않아도 나쁜 인간은 언젠가 스스로 파멸하는구나를 봐버린 나로서는 마음으로 승리했다를 외쳤지만, 겉으로는 덤덤하게 더 차갑게 단단하게 마음먹었다.

그가 눈 감는 그 순간까지 나는 마음을 내려놓지 않으며 정신을 가다듬고 

나의 생활에 더 성실하고 바르게 살아갈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나에게 집이란 늘 어둡고 축축한 시궁창 같은 곳이었지만, 

그곳에서 배우며 성장하고 나의 내면의 힘을 키워 부모의 도움 없이도 

곧게 성장할 수 있게 해 준 곳이라 감사한 장소이기도 하다.


결혼 이후에도 마음을 편히 놓을 수 있는 편안한 공간들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폭력과 폭언으로는 채워지지 않은 곳인 것에 작은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집이라는 형태보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밝은 마음의 에너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아주 일찍 알아버렸다. 

그 옛날 앞집 옆집 뒷집에서 저녁이 다가오면 밥냄새를 풍기며 

어머니들을 밥주걱을 들고 자식들의 이름을 불러대던 그때에 행복했던 집들을 보면 

모두 사랑이 있었고, 따뜻한 마음이 공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그런 순간을 아주아주 어렸을 적에 잠깐 느껴볼 수 있었지만,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나를 향수에 젖게 만든다. 

이런 소소한 작은 조각의 기억 덕분에 그나마 지금 버텨내며 살 수 있다.

행복이 뭐 별 건가? 남편과 작은 옥탑에서 뜯었던 치킨과 한 모금의 맥주를 잊을 수 없다.

(물론, 그놈의 사업이 무엇이길래 폭삭 망하는 순간이 오긴 했지만)


이번에 무진장 센 놈이 때리고 가서 그런지 이사를 해도 아무런 감흥이 없다. 

집이란 곳에 아무것도 들이지 않고 텅텅 비어있는 공간이 어색하지만 또 곳곳의 공백들이 편안하게 보인다.

또 언젠가 이 집과 헤어지게 되는 날 나는 가슴 한편에 묵혀 두었던 집에 대한 안 좋은 기억들을 하나씩 내려놓으며 다른 곳으로 이사할 것 같다. 

아마도 지금 어디에서 살아야 하나라고 인식되는 것은 집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어서일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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