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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 Hana Jul 21. 2020

박원순: 자살과 작약

브런치 시작하는 날

얼마 전부터 브런치에 글을 올리고 싶어 눈독 들이고 있다가, 어제 드디어 계정을 텄다. 막상 글을 입력하라는 깨끗한 첫 화면을 보니, 모아둔 글을 손질해 올리기보다는, 어떤 글이 나오든 오늘에 맞는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들어, 다시 하룻밤을 삭혔다. 아침에 브라우저를 켜니 세상에, 뉴스에도 소셜 미디어에도 온통 박원순 시장 이야기뿐이다. 이게 브런치를 시작하는 오늘, 2020년 어느 여름날의 주제다.

코칭을 처음 배우던 시기, 다양한 전통의 여러 선생님들을 만났는데 이야기의 시작 지점은 언제나 비슷했다. 사람은 누구나 온전히 순수한 존재라는 것. 온전히 순수하다는 뜻은 선과 악, 순결과 타락, 천사와 악마처럼 대립되는 반대어가 없는, 무조건적인 순수함이다. 이 사람이 어떤 행위를 했던, 그의 과거나 습관과는 별개로 그 사람의 존재는 언제나 새로운 가능성을 안고 있다. 마치 날아가는 공에 바람이 불면 공이 움직이는 경로가 달라지듯, 좋은 코치는 한 사람이 바꾸고 싶어 하는 삶의 경로나 이야기, 낡은 습관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가능성을 여는 일을 한다고 배웠다. 과거에서 자유로워지고 새로운 미래를 여는 작은 기적은 누군가 착한 일을 해서 상으로 받는 자격도 아니고, 반대로 끔찍한 일을 했다고 빼앗을 수도 없는,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가능성이다.

겹겹이 새로운 층이 펼쳐지는 사람의 내면을 흔히 양파에 비교하지만, 나는 작약이 더 좋다. 셀 수도 없는 여러 겹의 꽃잎이 끝도 없이 계속 피어나는 풍성한 작약, 적당한 양분과 충분한 공간만 주어지면, 와라 락 쏟아지듯 화려하게 피어날 탐 실한 꽃봉오리가 누구에게나 있다. 이 가능성을 무시하고, 한 사람에게 주홍글씨처럼 딱지 붙이는 행위를 나는 인간성 말살이라고 부른다. 이건 자신의 행위에 따르는 과보를 받는 것과는 전혀 다른 층위의 이야기다. 오래된 서부 영화처럼 사람을 좋은 놈, 나쁜 놈 그리고 못생긴 놈으로 사물화 해서 생각하는 경직된 사고 습관이 사람들을 자꾸 극단적인 선택으로 몰아가는 게 아닐까. 사회적인 단죄나 마녀사냥이 아니라, 안정적인 법 체계로 정의가 보장되는 사회였다면, 그래서 주관적인 정서가 아니라 공정한 처벌과 용서의 기준이 명확한 사회였다면, 흔히 하는 말처럼 ‘죄를 미워하되 사람은 사랑할’ 여력이 있는 사회였다면 금쪽같은 생명들이 자살할 일은 없지 않을까.

일단, 자살에 대한 단상은 이 정도로 하고, 그동안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온 ‘피해자-가해자’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 글부터 차근차근 풀어보자.


Photo by Annie Spratt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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