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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 Hana Feb 11. 2021

욕망이 나쁜 건가요?

욕망 탐구 1, 욕망, 욕심, 필요와 중독.

성(性)을 이야기할 때 가장 핵심이 되는 주제를 꼽으라면 저는 욕망(欲望)을 들겠습니다. 욕망을 대하는 자세가 바로 서면, 성생활뿐 아니라 대인관계에도 자연스럽게 균형이 잡힙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나에게 꼭 필요한 것,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방법, 상대방에게 바라는 점, 싫어도 양보할 수 있는 부분, 곧 죽어도 양보할 수 없는 것 등 욕망을 기반으로 건강한 관계의 바운더리를 다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욕망을 바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세상에 아무리 잘난 파트너를 데려와도, 마치 뿌리가 잘려 물을 흡수하지 못하는 식물처럼 메마른 사람이 되지요. 삶을 윤택하게 가꾸는 비밀은 배우자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있습니다. 욕망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살펴보면, 대인관계에서 반복되는 패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꼭 다른 사람이 문제라기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인정하지 못해 남 탓을 하며 사는 경우가 많거든요. 관계 개선은 자신의 자세가 원인이고 대인관계에 그 효과가 반영된다는 아주 단순한 이치를 깨닫는 데서 시작됩니다. 자신이 바라는 바를 분명히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악의 근원이고 나 자신은 피해자라는 식의 망상에 쉽게 빠지지 않습니다. 이처럼 여러 가지로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에 좀 따분하더라도 한자 어원을 같이 살펴 구체적으로 따져보려 합니다. 



욕망과 욕심(desire & hungry ghost)


욕망이 들끓는 시대입니다. 한편으로 욕망을 끊임없이 부추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욕망을 부끄럽게 여기는 상반된 메시지들이 편재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모든 재화가 넘쳐나도록 풍족한 시대에, 조금이라도 더, 조금이라도 더 나은 것을 끊임없이 찾는 인간의 물욕(物慾)을 탓하지요. 성욕(性慾)을 언급할 때도, 욕망을 죄악시하거나 창피스럽게 여기는 표현이 참 많습니다. 하지만, 무언가 바라는 게 나쁜 건가요? 조금이라도 더, 조금 더 나은 것을 바라기 때문에 사람들은 참 열심히 살아가지 않습니까? 성욕이 없었다면, 우리 중 누구 하나 배 속에 잉태될 수 있었겠습니까? 욕망(欲望)은 결코, 나쁜 것도, 부끄러운 것도, 더러운 것도 아닙니다. 떡 먹고 싶을 때 떡 먹고, 밥 먹고 싶을 때 밥 먹는 게 어떻게 나쁜 일이 되겠습니까. 


보통 혼동해서 쓰지만, 욕망을 말할 때 쓰는 한자 ‘욕'에는 두 가지 글자가 있습니다. 하고자 할 욕(欲)과 욕심 욕(慾)입니다. 하고자 할 욕(欲)은 계곡(谷)에 입을 벌린 사람(欠)이 있는 모양으로, 목마른 사람이 계곡에서 물을 마시려고 하는 형태이고, 욕심 욕(慾)은 하고자 할 욕(欲)에 마음 심(心) 자가 더해진 모양입니다. 갈증은 물을 마시면 해소되지만, 탐내는 마음은 욕망이 해소된 이후에도 계속될 수 있습니다. 몸의 신호에 민감한 사람들은 자기 먹을 양을 채우면 수저를 놓지만, 몸과 마음 사이 연결이 매끄럽지 않아 먹을 만큼 먹고도 계속 먹는 사람들이 있지요. 아무리 먹어도 배부른 줄을 모르고, 아무리 좋은 것을 가져도 이를 누리기보다, 아직 못 가진 것을 찾아내어 계속 원하는 마음을 품는 것이 탐욕(貪慾)입니다. 탐욕에 중독된 마음은 몸에 기반한 자연스러운 욕망과 연결이 끊어진 인위적인 습관입니다. 평소 먹고 싶었는데 억지로 참아온 디저트나, 아이스크림을 생각해 보세요. 그 아이스크림을 대형 용기로 사서 퍼먹어보면, 마음 같아서는 한 통을 다 비울 것 같지만, 보통은 한 번에 다 먹지 못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파트너와 성관계를 시작해도, 하고, 하고, 또 하면 언젠가는 잠깐 쉬었다 가야 할 때가 옵니다. 욕망은 어느 순간 시작해서, 자라고, 꽃 피우고 시드는 자연적인 주기가 있는 반면, 욕심은 마음의 습관이기 때문에 대상을 바꿔가며 지속되지요. 



필요와 중독 (Need & Addiction) 


어느 순간 자신에게 필요한 건, 오직 당사자만 알 수 있습니다. 욕망이 원하는 무언가를 향해 밖으로 뻗어가는 모양이라면, 필요는 지금 나에게 있어야 하는데 없는 무엇, 부재를 알아차리는 인식입니다. 중독은 몸이 한 가지 형태의 자극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져, 다른 자극에 둔감해진 상태입니다. 매운맛에 길들여진 사람은 다른 미묘한 맛을 분별하지 못하고, 담배를 통해 니코틴에 중독된 사람은 위와 폐의 피로감에 상대적으로 둔감해지지요.  


사람들의 몸을 깨우는 명상, 오르가슴 명상이라는 자극적인 이름의 명상을 가르치다 보면, 몇 가지 자주 듣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성적 쾌감에 중독되면 어떻게 하나요?’라는 질문이지요. 몸을 대하는 마음의 태도가 잘 드러나는 질문입니다. 일단 간단하게 대답하겠습니다. 명상을 통해 몸의 섬세한 감각을 느끼기 시작하면, 중독을 계속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저는 담배와 술을 참 좋아했는데, 명상을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이 둘을 멀리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이 질문에는 쾌감을 느끼는 게 위험하다는 이상한 인식이 깔려 있습니다. 이런 질문은 몸의 느낌에 따르기보다는 자신을 통제하려는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 자주 합니다. 몸의 느낌을 따랐다가, 자제력을 잃을까 두려운 마음이 중독이라는 이미지를 불러온 셈이죠. 그만큼 무언가 느끼고 싶은 몸의 욕망도 크고, 욕망을 따랐다가 잘못될까 두려운 마음도 큰 상태입니다. 마음은 느낌, 감각, 욕망 등 몸에서 일어나는 신호를 쉽게 믿지 못합니다. 무언가 원하거나 필요로 하는 인간 일반의 취약성도 어지간하면 인정하지 않으려 기를 씁니다. 느끼는 건 좋은 겁니다. 쾌락을 느끼는 것도 좋은 겁니다. 더 많이 느낄수록 더 생생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더 분명히 느낄수록, 남이 좋다고 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이 느끼기에 윤택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한 번 수행하는 데 맛을 들이고 나니, 저는 언젠가부터 앉아서 하는 명상도 즐겨 하기 시작했습니다. 명상을 안 하면 어딘가 꿉꿉하고 찌뿌둥한 것이 마음이 찝찝해서 가능한 자주 하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나 스스로 명상에 중독되었다고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어릴 때는 몰랐는데, 파트너를 만나 같이 살다 보니 손으로 만지고 살을 비벼대는 애정 표현이 중요한 사람이란 걸 배웠습니다. 그래서 옆구리가 심심하면 파트너 옆에 앉아서 무릎이라도 비벼댑니다. 술을 마시는 일이 거의 없는데, 꼭 한 친구네 집에만 가면 그 녀석이 위스키 병을 눈앞에 흔들며 유혹합니다. 그래서 그 친구와 약속을 잡을 때는 이틀 일정으로 계획해서, 다음 날은 쉬도록 조정합니다. 


어느 순간 나에게 필요한 건, 오직 나만 알 수 있습니다. 



Photo by shahab yazdi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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