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제를 지탱하는 우리 안의 위도우
<블랙 위도우>를 은근히 기다렸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아이맥스 영화관에 예약을 하려고 보니, 맨 앞자리 밖에 남지 않아, 잠시 고민했다. 괜찮겠지 생각하고 예약을 해버렸는데, 웬걸. 영화를 보는 내내 45도 기울어진 목으로 고문을 당했다. 왼쪽 맨 앞줄에 앉아 약간 구부러진 아이맥스 스크린을 바라보면, 인물의 얼굴이 우측 상단에 비칠 때는 얼굴 좌우가 일그러지는 시각효과가 발생한다는 것도 배웠다. 목이 구부러지는 고통을 잊을 만큼 잘 만든 영화는 아니지만, 나는 나름대로 좋았다. 가부장제에서 여자가 해방되는 과정에 대한 선동 영화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고 이 한마디가 내내 마음에 남았다. ‘드레이코프를 정말 죽였어? 죽은 걸 니 눈으로 확인했어?’
살짝 줄거리를 소개하면, 드레이코프는 나타샤와 엘레나를 킬러로 키운 소련 첩보조직의 수장이다. 나타샤는 그를 오래전에 제거했다고 믿고 살았다. 그의 어린 딸이 집으로 들어가는 걸 보면서도, 희생을 감수하고 이미 설치한 폭탄을 터트렸다. 그런데 수년 뒤에 다시 만난 나타샤의 동생, 엘레나는 그가 여전히 건재하다고 전한다. 조직은 더욱 은밀하고 깊숙하게 확장해서, 드레이코프를 위해 일하는 여성 킬러, 위도우들이 전 세계에 퍼져있다. 나탸샤는 다시 한번 드레이코프를 죽이기 위해 길을 나선다.
‘내 안에 위도우’
드레이코프는 가부장제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아마 누구나 한 번은 권위와 탐욕에 찌든 가엾은 인간을 만나봤으리라. 어디서나 눈에 잘 띄는 이런 유형 말고 이 권위를 뒷받침하는 유형에 대해 생각해보자. 약간 정신 나간 것처럼, 아니면 정말이지 최면에 걸린 것 마냥 이치에 맞지 않는 권위를 떠받들기 위해 온 몸을 바쳐 충성하는 위도우 말이다. 위도우 없이 드레이코프가 영광을 누릴 수 없다는 건 뻔한 일, 그렇다면 가부장제가 계속 발생하는 이들의 관계 역학을 들여다봐야 하지 않을까? 과연 내 안의 어떤 캐릭터가 권위적 유형과 부딪혀 가부장제를 지피는 불씨를 살리는가?
가부장제를 뒷받침하는 우리 내면의 캐릭터는 항상 외부의 권위적 목소리를 필요로 한다. 선택을 내려야 할 때 자기 자신보다는 외부의 인정에 기반한 결정을 하며, 항상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고민한다. 이 캐릭터는 보호와 감독이 필요한 불안한 아이 같은 존재다. ‘아빠, 이거 고쳐줘.’, ‘나 이거 열심히 했는데, 칭찬해줘!’, ‘이거 내가 잘한 거야, 못한 거야?’, ‘저기 나쁜 애가 있는데, 혼좀 내줘!’ 이런 캐릭터는 주로 다른 사람이 말하는 대로 하기 때문에, 무언가 일이 잘못되었을 때도 자기 대신 진짜 결정을 내린 외부의 누군가에게 잘못을 돌린다. 이 목소리를 따라 살다 보면, 자기 인생이 아니라 어디서 이미 짜인 이야기를 사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이 캐릭터가 한 여름 아스팔트에 내던져진 지렁이마냥 선명하게 드러나는 상황이 있다. 바로 누구도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을 때, 그동안 자신을 지탱한 권위와 인정의 틀이 없는 상황에 놓였을 때, 내면의 불안한 아이가 완전히 땡볕에 노출된다. 찌질한 개인사이지만, 이보다 적당한 예가 없어 내 과거사를 잠깐 들춰보겠다. 지금 하는 일을 시작하기 전, 이제는 전생처럼 멀게 느껴지는 옛날, 프랑스로 유학을 갔더랬다. ‘한 자유하는 사람들’은 유럽으로, 특히 프랑스로 가는 것 같았다. 가까운 선생님 한 분이 프랑스 고등 교육 과정은 분명한 틀이 없어 실패 확률이 높다며 다시 생각하길 권하셨다. 그리고 딱, 그 꼴이 났다.
프랑스에서 만난 지도 선생님은 상당히 캐주얼하고 열린 사람이었는데, 나는 권위를 상징하는 그 앞에만 서면 신기하게도 입이 얼어붙었다. 한국에서는 자존감이 없어도 대충 눈에 보이는 기준을 맞춰가며, 적당한 외형으로 둘러 댈 수 있었는데, 환경이 바뀌자 자존감의 부재는 나는 아무리 해도 결코 충분하지 않을 거라는 비관으로 나타났다. 단단한 내면이 아니라 외부의 압력으로 지탱해 오던 내 삶은, 압력이 사라지자 무형으로 흘러내렸다. 항상 스스로를 검은 양이라고 여겼지만, 나도 사실 한국식 ‘사회생활'의 산물이라는 걸 그때 알게 되었다. 지도교수는 아버지처럼, 선배들은 언니, 오빠처럼 권위와 인정의 틀을 짜주었고, 내가 선택한 학과를 못마땅해하시던 아버지도 사실 딸이 공부 잘하는 걸 내심 좋아하셨다. 수평선처럼 눈을 맞춰야 하는 권위와 인정이 부재할 때, 더 이상 착한 딸 노릇을 할 필요가 없을 때,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그래서 드레이코프는 두 번 죽는다. 밖에서 한 번, 안에서 한 번. 전혀 새로운 나라로 떠나, 환경을 바꾸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최면에 걸린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계속하던 사고와 행동의 습관을 계속 들여다보고 매일 조금씩 바로 잡아야 했다. 정해진 답을 주는 사람이 없을 때, 마치 가부장제라는 약 기운이 떨어져 고통받는 것처럼, 권위와 인정에 대한 중독으로 괴로워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불안한 어린아이가 천천히 어른으로 자라났다.
‘선택의 순간'
코칭이라는 직업상, 사람들의 선택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우리 내면에 있는 불안한 어린아이도 자주 만난다. 이 아이는 가치가 조직에서 온다고 믿는다. 가치를 창조하는 건 사람이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잘 안 듣는다. 자기 자신은 잠시 묻어두고, 튼튼한 조직에 모든 걸 맡기면 죽을 때까지 조직이 나를 책임져 줄 것처럼 생각한다. 과연 그런가?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믿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불안을, 어린아이처럼 외부의 누군가가 해결해 주길 바라는 건 아닌가? 네가 좋아하는 그 유명한 조직들이, 사실은 자기 안에 내재된 가치를 철벽같이 믿은 사람들이 창조해낸 거라고, 네가 타고난 가치는 스스로 믿을 때만 진가를 발휘한다고 틈틈이, 짬짬이, 열심히 이야기한다.
우리 모두는 매일매일 시험을 당한다. 사람들은 매일매일,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보였다간 누군가 싫어할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조직 안의 누군가 부탁한 일을 거절하면 후에 보복을 당하리라 두려워한다. 외부의 인정과 나 자신이 대립하는 상황, 조직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위도우와 내 안의 진실이 대립하는 모든 순간, 당신은 해방과 가부장제 사이 기로에 놓인다. 그래서 오늘도 묻는다. 나 자신에게, 그리고 내 친구들에게.
당신은 정말 드레이코프를 죽였는가?
건투를 빈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같이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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