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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m Hana Sep 15. 2021

피해자 삼각형에서 벗어나는 길

내면의 진실을 받아들이는 과정

*이 글은 제가 피해자 삼각형을 배운 선생님 린 포레스트(Lynne Forrest)의 글 “The Three Faces of Victim - an overview of the Victime Triangle”을 번역한 글입니다. 원본은 그녀의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lynneforrest.com/articles/2008/06/the-faces-of-victim/?fbclid=IwAR0scyq0z5QN54fJSN-kWoCWBYVr93KIEwoN46E285Cg1m6SeDvWZWqb9MU




피해자 삼각형의 영향


스타팅 게이트 역할이 뭐든지 간에, 피해자 삼각형 사이클을 반복하는 한 드라마와 괴로움에 시달리게 됩니다. 세 역할 모두 감정적, 정신적 고통은 물론 심지어 육체적 고통을 겪기도 하죠. 고통을 모면하려 타인을 비난하거나, 자신을 돌봐줄 사람을 찾더라도, 삼각형 사이클 안에서 이는 더 큰 괴로움을 가져올 뿐입니다. 다른 사람을 진실에서 보호하려 할 때(구원자), 우리는 그들의 능력을 무시하고 이후 더 큰 손실을 초래합니다. 삼각형 사이클에 연루된 모두가 결국은 상처 받고, 분노하게 되지요. 이 관계에서 승자는 없습니다. 삼각형의 세 역할 모두 겪게 되는 어떤 대가가 있습니다. 그중 몇몇을 여기서 다뤄보지요. 



개인적 책임 부재


자신에 대한 책임을 지지 못할 때마다, 우리는 삼각형 사이클에 빠집니다. 자신의 책임감을 자랑스러워하는 구원자조차도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주변에 모든 사람을 돌보지만, 정작 자기 자신을 위해서 뭘 해야 하는지는 전혀 모르지요. 자신을 비롯한 누군가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면, 십중팔구 피해자 삼각형의 역할극이 벌어지고 있을 겁니다. 박해자는 자신의 고통을 남 탓으로 돌리며 책임을 모면하려 들지요. 피해자는 항상 자신을 책임져 줄 다른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세 역할 중 누구도 자기 스스로 책임을 지려하지 않습니다. 


삼각형 사이클을 반복하는 동안, 우리 삶은 무의식적 반작용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개인적 선택, 책임감에 기반한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게 아니라 무의식적 믿음 체계와 다른 사람이 정한 규칙에 따라 살게 되지요.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삼각형 사이클에서 벗어나려는 의식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피해자 드라마를 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연민도 함께 말이죠. 



고통스러운 믿음 체계 


우리 자신과 세상에 대한 믿음 체계는 어린 시절 형성됩니다. 이런 믿음 체계는 엄격한 규칙으로 표현되는 데, 성장을 위해서는 언젠가 부숴버려야 할 경우가 많죠. 가족 내에 암묵적인 규칙들을 생각해보죠. “그 얘기는 하지 마”, “감정을 드러내지 마”, “자신을 돌보는 건 이기적인 일이야.” 우리가 내적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무의식적으로 우리를 지배해 온 이런 믿음들에 이의를 제기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오랫동안 따라온 규칙들에 도전할 때, 당연히 불편한 마음이 듭니다. 하지만 이런 느낌은 오히려 축하할 일입니다. 우리를 그동안 삼각형 안에 묶어둔 고통스러운 믿음 체계에서 스스로 자유로워지고 있다는 신호니까요. 


불편한 감정에 반응하지 않고, 그 느낌과 같이 가만히 앉아 시간을 보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죄책감을 예로 들어보죠. 죄책감을 느낀다고 해서 항상 우리가 뭘 잘못했거나, 비윤리적인 일을 한 건 아닙니다. 죄책감은 학습된 반응입니다. 가족 내의 해로운 상호작용을 드디어 깨고 나왔을 때, 죄책감을 느끼는 경우도 많습니다. 


심리 치료사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회자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햄을 굽는 방법에 관한 건데요,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휴가철, 가족이 함께 하는 저녁식사에서 어린 소녀가 햄의 양 끝이 뭉툭하게 잘린 걸 보고 엄마한테 물었습니다. “왜 햄을 요리할 때 양 끝을 잘라요?” 엄마가 별생각 없이 대답했죠. “왜? 너희 외할머니가 햄을 구울 때 항상 이렇게 하셨거든. 그래서 이게 햄을 잘 굽는 방법이란 걸 보고 배운 거야.” 마침 소녀의 외할머니는 멀지 않은 곳에 살고 계셨죠. 그래서 다음번에 외할머니 댁에 갔을 때 소녀는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외할머니, 왜 햄을 구울 때 양 끝을 잘라서 구워요?” 외할머니도 자기 엄마가 햄을 구울 때 똑같이 했다는 대답을 했죠. 다음 휴가철에 소녀의 증조할머니가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 이유가 정말 궁금했던 소녀는 드디어 진짜 이유를 알아냈습니다. “아가야, 내가 옛날에 햄을 구울 때, 햄을 구울만한 팬이 집에 하나밖에 없었거든. 그런데 그 팬이 햄을 다 담기에 너무 작았어. 그래서 햄 양 끝을 잘라내야 했단다.” 


가족 내에 암묵적인 규칙들은 이렇게 생깁니다. 평생 고통만을 안겨 주는 해로운 믿음 체계도 우리가 단순히 질문을 던지지 않아, 계속 따르며 사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고통스러운 감정 


삼각형 사이클에 처음 말려들 때, 특정한 고통스러운 감정을 통해 진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감정이 스스로를 지배하도록 내버려 둡니다. 한 생각에 사로잡혀서, 그 생각이 죄의식이나 두려움을 가동하고, 삼각형 사이클에 다시 참여하는 방향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우리의 무의식적 반작용은 고통스러운 감정을 제어하거나, 제거해서 ‘더 낫게' 느끼려는 그릇된 시도입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을 구해줄 때, 본인과 다른 사람 둘 다 기분이 좋을 수 있습니다. 서로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말이죠. “그 애는 그거 혼자 못해”, “그러면 기분이 상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끌려 구원자가 피해자 대신 일을 처리하게 되죠. 다른 사람의 문제를 고쳐줄 때, 기분이 좋을 수 있죠. 상황을 제어하고 있다는 착각에, 자신감이 생기거나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때 구원자가 느끼는 힘은 피해자의 희생을 동반합니다. 피해자는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못하다고 느끼거나, 더 적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니까요. 


예를 들어 보지요. 


샘은 자기 아들인 폴이 좀 부족하다고 느꼈습니다. 아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곤 했지요. “그 애는 좀 멍청해요. 세상에 나가서 결코 잘 해내지 못할 거요.” 샘이 아들과 관계 맺는 주요 방식은 구원자였습니다. 자기 아들이 멍청하다는 믿음 때문에 죄책감, 우려 그리고 의무감을 느꼈지요. “그 애는 내 아들이고, 나는 그 애가 필요한 걸 해줘야 해. … 아들을 인도해주고, 조언을 해주고, 그 애가 말썽을 일으키면 거기서 구해주어야 해. 그 애는 제 힘으로 살아가기엔 좀 멍청하니까, 내가 대신해주는 수밖에 없지.” 이게 샘이 생각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지요. 


그 사이 아들인 폴 역시 어떤 각본대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힘으로 성공할 수 없다는 아버지의 믿음을 내면화했죠. 삶에 대처할 기본 능력이 없다는 믿음 때문에 그는 스스로를 무능한 실패자로 보았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폴이 무능력하다는 가정 위에서 세워졌습니다. 


그러면 폴처럼 자신이 무능하게 타고났다고 믿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자신을 항상 서투르고 부족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 어떤 좋은 선택을 기대할 수 있나요? 이런 고통스러운 믿음을 가진 사람이 ‘멍청한' 선택밖에 할 수 없다는 게 너무 당연하지 않나요? 폴은 무언가 시도할 때마다,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믿음이 옳다는 걸 반복적으로 증명했습니다. 


이 둘이 이렇게 고통스럽고, 제한적인 각본을 믿는 한 이들의 관계는 삼각형 사이클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폴은 하는 일마다 망쳤고, 아버지는 그 뒤처리를 감당했죠.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린, 만약 그게 사실이 면요? 폴이 정말 무능하게 타고났을 수도 있잖아요?”


이런 질문에 대해 저는 그저 안다고 대답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체계가 그렇게 만든다는 걸 압니다. 우리는 믿는 대로, 다른 사람을 대합니다.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가정에 의문을 제기할 때, 상대방과의 상호작용은 분명히 달라집니다. 


샘과 폴의 관계는 아버지인 샘이 아들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기 시작하면서 변화했습니다. 아들이 항상 자신을 필요로 하도록, 아들을 의존적으로 키웠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자 전에 없던 아들에 대한 존중을 느낄 수 있었죠. 자신의 선택에 따른 자연적인 결과들을 아들이 직접 경험하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멍청한 선택'을 한 데에 한참 질책을 퍼붓고, 아들을 어려움에서 구해줬겠죠. 그래서 폴은 자신의 선택과 실수를 통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샘이 자신의 믿음과 감정에 책임지는 쪽을 선택했기 때문에, 이들의 부자관계는 완전히 변했습니다. 아버지가 구원자 역할을 완전히 포기하면서 이 둘은 삼각형 사이클에서 벗어나 진실된 관계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의견, 감정이나 생각을 타인으로부터, 그리고 심지어 자기 자신으로부터 숨기면서 감정을 관리하려 합니다. 그 결과 자신의 안녕을 헤치고, 자기 자신과 타인으로부터 점점 멀어집니다. 삼각형 사이클을 계속하는 또 다른 방법이죠. 


자신의 감정이 자기가 아들에 대해 품고 있던 믿음에 기반한다는 걸 받아들였을 때, 샘은 드디어 삼각형 사이클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무의식적 믿음과 생각에 따라 항상 행동해왔다는 걸 완전히 인정했죠. 


이 지점이 우리가 삼각형 사이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열쇠입니다. 우리 자신과 타인에 대한 고통스러운 이야기들이 참 많죠. “난 남들에게 도움이 될 때만 사랑받을 수 있어”, “난 중요하지 않아”, 라든가 주변인들에 대한 왜곡된 믿음 “그들이 나를 해치려고 해”, “저 애는 스스로를 돌볼 능력이 없어” 같은 개인적 확신은 이런 믿음들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행동하도록 합니다.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 자신과 타인에 대한 제한적 사고방식에서 기인하죠. 이런 감정과 사고방식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다 보면 결국 내면의 제한적 믿음이 사실이라고 증명하게 됩니다. 피해자 삼각형의 악순환은 이렇게 계속됩니다. 



부인 


스스로의 감정을 부인할 때마다, 우리는 피해자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감정은 현실입니다. 움직이는 에너지, 살아있는 동력이지요. 감정을 축소하거나, 약화하려 할 때마다 역으로 감정에 사로잡혀, 충동적인 반응을 하게 됩니다. 감정을 인정하지 않을 때, 우리는 스스로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없습니다. 의식이 부인한 ‘내적 폭군'이 무대 뒤편에서 우리의 행동을 조정하기 때문이죠.  


감정이 내적 믿음의 자연적 귀결이라 하더라도, 감정은 매우 중요합니다. 불행한 생각을 하고 있으면 감정이 신호를 보내죠. 예를 들어 기분이 ‘나쁠’ 때, 우리는 스스로가 불행하고, 뒤틀린 믿음 체계에서 사고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감정을 부인하는 대신, 감정을 따라가 그 뒤에 있는 믿음 체계를 발견하도록 연습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의식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틈이 열립니다. 뒤편에 숨었던 믿음 체계가 명확해지고, 이를 의식적으로 다루기 시작하면 고통스러운 감정은 사라집니다. 감정을 분명히 인지할 때, 삼각형 사이클에 우리를 구속하는 제한적 믿음 체계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감정이 생각을 따라 일어난 다는 걸 모르고 자란 사람들, 감정을 받아들이거나 표현해도 좋다는 허락 없이 자란 사람들은 보통 자기 아이들도 똑같이 기릅니다. 어떤 감정은 잘못되었고, 나쁘다고 아주 어린 시절부터 배우며 자라서, 그 감정 뒤에 있는 생각을 점검해 볼 생각도 못한 채, 감정을 부인하고 억누르며 살아갑니다. 


감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해서, 감정이 어디로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자신과 타인에 대한 고통스러운 이야기들에 기반해 살아가는 동안, 똑같은 부정적 감정들이 계속 밀려옵니다. 우리가 억누르고, 부인한 감정들은 마음속에 수치심이라는 비밀 주머니가 되지요. 수치심은 우리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소외시키고, 평생 삼각형 사이클을 반복하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어떤 때는 기분이 나빠지는 걸 피하기 위해서 스스로의 감정을 부인하기도 합니다. 불행하게 끝날 시도라는 게 뻔하죠. 이런 느낌이 너무 지나치고, 자신이 감정을 감당할 수 없다고 스스로에게 이야기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감정들이 생기는지, 감정을 느낄 때 어떻게 해야 되는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내적 고통에 휘둘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상책이라고 여길 수도 있죠. 


하지만 고통스러운 감정을 유발하는 건 우리의 생각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불행한 감정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걸 알면, 불편한 감정들을 더 이상 억누를 필요가 없어지죠. 이런 단순한 원리를 받아들이고, 내면화하기 전까지 사람들은 동원 가능한 모든 억제 기제를 사용해 고통을 피하려고 합니다. 감정을 회피하려는 시도들의 피할 수 없는 귀결은 삼각형 사이클을 끝도 없이 반복하며 괴로워하는 것이죠. 



부정직 


피해자 삼각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꼭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져야 합니다.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않고, 삼각형 사이클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책임을 지려면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진실에 따라, 필요한 행동을 취할 의지가 필요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감정을 부인하면서 스스로에게 솔직해질 수는 없습니다. 자신을 부정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부인한다는 걸 기억하세요. 인식의 어느 층위에서든지, 자신의 생각, 행동이나 감정을 부적절한 것으로, 그래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결정했다면, 자신이 그런 생각, 행동, 감정을 품었다는 것조차 인정할 수 없을 겁니다. 스스로 부적절하다고 판단한 자신의 일부를 인정하는 건 상당히 고통스러운 일이죠. 자신과 타인에게 정말 솔직해지려면 자신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스타팅 게이트 구원자가 솔직해지려면, 무의식적으로 타인을 의존적으로 묶어두려 했다는 걸 인지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려는 스스로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구원자가 되었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죠. 구원자가 타인을 연약하고, 무능력한 피해자로 보는 한, 타인을 돌봐야 한다는 믿음체계로 자신을 계속 기만하겠죠. 구원자 자신의 필요는 인정하지도, 충족시키지도 않을 겁니다. 


비슷한 방식으로, 스타팅 게이트 박해자는 자신의 고통을 남 탓으로 돌리면서 스스로를 기만합니다. 박해자가 자신을 무고한 구경꾼이나, 부당한 처우를 당한 피해자로 바라보는 한, 피해자 삼각형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스타팅 게이트 피해자가 삼각형 사이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들이 ‘조금' 의존적인 방식으로 살도록 노력해왔다는 걸 고백해야 합니다. 어떻게 타인을 감정적으로 조정해서 그들을 계속 돌보도록 했는지, 스스로가 무능력하다는 각본을 어떻게 관계에서 사용해왔는지 솔직히 인정해야 하죠. 그렇지 않으면 절망과 무가치함에 빠져 더 깊이 추락할 겁니다. 


현실을 살기 위해서는 진실을 마주해야 합니다. 진실을 말하려면, 먼저 뭐가 진실인지 알아야 하지요. 스스로 부인해 억누른 감정과, 무의식적 사고체계를 따라 반응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자신의 진실이 뭔지 알 수 없습니다. 현실과 괴리된 채로 살아가게 되지요. 항상 숨은 의도와 거짓이 그림자처럼 따릅니다. 이게 피해자 삼각형에서 일어나는 역할극의 또 다른 측면입니다. 스스로의 진실을 알 때, 비로소 통일된 온전한 자아로 말할 수 있지요. 그 후에는 삼각형 사이클을 더 이상 반복할 수 없습니다. 




사진 출처 : "Roger Wilkerson, The Suburban Legend!, Happy Monday, Back to the hamster wheel..."  https://rogerwilkerson.tumblr.com/post/82680289198/happy-monday-back-to-the-hamster-whe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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