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쩌면 음악 그리고 춤과 가장 많이 닮아 있는지도 모른다.
춤추는 에너지 실과 원자로부터 계층을 이루고 있는 생명체. 이 둘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원자와 생명체의 관계는 생각보다 훨씬 가깝다. 왜냐하면 고갱이 그림을 통해 던진 질문 ‘우리는 무엇인가?’와 연결되는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과학적으로 처음 던진 사람도 물리학자였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이자 ‘슈뢰딩거의 고양이’[1]로 유명한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odinger, 1887-1961)가 그 주인공. 비록 그가 노벨상을 수상한 당대의 물리학자였다 하더라도 생명의 본질을 설명하는 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 스스로 숨 쉬며 살아 있는 경이로운 자신이면서
동시에 생명이 없는 원자들의 모음일까
하고 말이다.
지구 상에 어떤 물체가 출현하면, 그것을 '생명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생명'과 '생명이 아닌 것'의 사이에 경계선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생명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 무언가를 정의할 때 특성을 열거하며 기술하는 것은 비교적 쉽다. 생명에 대한 생리학적 특성은 성장Growthㆍ운동Movementㆍ감각Sensitivityㆍ섭식Feedingㆍ치유Healingㆍ재생산Reproductionㆍ죽음Death이다.
진화생물학자인 에른스트 마이어(Ernst Walter Mayr, 1904-2005)는 ▶복잡하며 적응하는 조직
▶거대분자의 화학적 집합 ▶양보다 질적인 현상 ▶유일한 단위의 다양한 집합체 ▶진화된 유전 프로그램 ▶공통 혈통 ▶자연선택의 소산 ▶예측 불가능한 생물학적 과정 8가지를 생명과 생명 아닌 것을 구분 짓는 특성이라고 했다.
그러나 대상의 본질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도록 설명하는 일은 무척이나 어렵다. 그중에서 생명만큼 정확한 정의를 완강히 거부하는 것도 드물다. 하물며 원자의 모음을 생명으로 이해하기란 더더욱 어렵다. 오죽하면 영국의 수학자 마커스 드 사토이는 인간의 몸이 복잡하고 어려워, 양자역학이 고등학생용 연습 문제처럼 보인다고 했을까.
인류는 이미 원자 내부의 양자 세계와 거시 세계의 우주를 보여주는 장엄한 위업을 이루었지만, 이 두 극단의 세계 사이에 있는 영역은 여전히 상당 부분 베일에 가려져 있다. 질량분석계나 우주망원경이 보여주는 경이로운 것들에 비하면 언제나 쉽게 관찰이 가능한 생태계나 종 그리고 세포들은 하찮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생명이 있는 거의 모든 것은 물리학자가 원자 연구에서 흔히 기대하는 정확성으로는 설명할 수조차 없을 만큼 복잡하고 예측하기도 어렵다.
작은 나비 한 마리가 초원을 지나는 정확한 경로를 예측할 수 있을까? 당신의 고양이가 어떤 동선으로 움직일지 예측할 수 있을까? 당장 내일 당신의 머릿속에 떠오를 생각들을 미리 목록으로 만들 수 있을까? 그에 비하면 전자나 행성의 궤도 운동을 모델로 만드는 일은 차라리 애들 소꿉놀이라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생명의 기원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조차 명시적인 답을 찾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아마도 그것은 생명이 갖는 독특한 특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양자생물학(Quantum biology)
과학자들의 가장 큰 미스터리 3개는 우주의 기원, 생명의 기원, 의식의 기원이다. 이중 생명의 기원에 대해 2004년 희귀한 철새인 울새 연구로 양자생물학이 태동했다. 2020년 현재 효소 촉매, 광합성, 조류 항법 등이 양자생물학의 가장 인기 있는 응용 분야다. 연구자들은 이미 후각, 의식의 기원, 그리고 생명의 기원에서 양자적 기반을 찾고 있다. 양자역학의 거물인 슈뢰딩거와 보어는 생물학과 양자역학의 결합이 과학의 최전선이라고 보았다.
인류 역사의 시초에 가장 쉽게 선택된 생명에 관한 설명의 틀은 어디서든 자신과 비슷한 생명체를 보는 고찰 방식이었다. 인간은 어디에서나 생명을 보았으며, 따라서 여기서 있음은 곧 ‘살아 있음’을 뜻했다. 땅이 살아 있어 땅 위의 모든 것을 먹여 살렸고, 하늘이 살아 있어 비ㆍ바람ㆍ천둥을 보내며 정확하게 낮과 밤을 교체하고 사계절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물ㆍ불ㆍ바람ㆍ나무ㆍ돌 등 모든 것이 살아서 자신의 생명력을 뽐냈다.
모든 것을 생명으로 보는 이와 같은 시각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오히려 죽음이다. 죽음이 고대인들에게는 가장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였다. 이처럼 모든 것을 살아 있는 것으로 보는 이론을 철학적으로 물활론(Hylozoism), 또는 정령신앙(Animism)이라고 한다. 만물에 '혼 또는 영이 들어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들에게는 세계가 살아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가정이었고, 그들이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는 주위의 현상들이 그 가정을 뒷받침해주었다.[2]
하지만 생명과 생명 아닌 것이 어떤 근본적인 방식으로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 ‘생기론자(Vitalist)’들이 생물은 만질 수 없는 정령이나 영혼에 해당하는 어떤 특별한 요소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 반면 ‘기계론자(Mechanist)’들은 생물은 정교한 기계에 불과하며 무생물의 물질과 똑같은 물리적ㆍ화학적 법칙을 따른다고 주장했다.[3]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기론자였다. 물질은 정지해 있는 것이 본질이라고 설파했던 플라톤에 이르러서야 생명이 철학적 개념이 된다. 그는 생명은 '내적인 운동의 힘’이라고 했다. 살아있는 것은 ‘자기 운동 능력을 갖춘 것’이며, 생명의 원리는 ‘영혼’이라고 생각했다. 기계론자의 대표 격인 데카르트는 무형의 정신과 유형의 육체를 명확하게 구분했다. 비물질인 영혼이 물질인 육체와 뇌 속 솔방울샘(Pineal Gland)에서 상호작용한다고 주장했으며, 이곳이 바로 영혼이 거주하는 장소라고 생각했다.
생명의 본질은 플라톤 이후 많은 철학자들의 관심사였으나 오늘날 너무나 ‘과학적’인 주제로 여겨져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한편 과학자들은 생명의 본질이 지나치게 ‘철학적’인 문제라고 생각해서 진지하게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은 생명이란 '문제 해결의 과정'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4] 여기서 ‘문제’는 하나의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Question과 Problem 두 가지를 동시에 품고 있다. 우리는 해답을 찾기 위해 스스로 묻는다(이것은 인간과 다른 생명체와는 또 다른 특성이기도 하다). 베르그송이 말한 문제는 생명체인 우리에게 있어 사전에 미리 결정될 수 없는 그 무엇, 즉 미지의 사건들과 관련된 것이다.
생명과 생명체에 시간성이 도입될 수 있는 이유도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슈퍼 바이러스의 출현은 항생제 문제로부터 스스로 생존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이런 이유로 항생제를 남용해서는 안 된다). 최근 국내 연구진이 B형 간염바이러스와 거대세포 바이러스가 스스로 생존하는 데 숙주세포의 RNA 보호 시스템을 역이용한다는 사실을 규명했다고 한다.
[5] 바이러스라는 생명체도 결국 생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방식을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다.
사실 삼라만상에 대한 의문과 문제 해결의 노력을 도입하지 않고서는 생명을 생명 아닌 것으로부터 구분할 수 있는 어떤 기준도 정확히 제시할 수 없게 된다. 바위는 스스로 질문하지 않으며, 현재와 미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하지만 생명체인 우리 인간의 삶은 의문을 품고 질문을 통해 과거, 현재, 미래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의미를 찾고 세대를 거쳐 더 나은 해답을 찾기 위해 질문은 이어지고,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법이 발견되는 것이다(<운동 안내서>를 쓰려고 한 것 또한 모든 것의 본질은 결국 운동[Movement]이 아닐까 하는 물음에서 시작됐고, 결국 문제의 해답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러한 과정 또한 생명이고, 삶이며, 움직임이다).
1943년, 슈뢰딩거는 물리학과 화학으로 생명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강의하고 이후 출판한《생명이란 무엇인가?》(1944)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생명의 근본적인 양대 기능인 ‘자기 복제’와 ‘신진대사’에 대한 개념적 기초를 물리학에서 찾아냈다. 복제는 양자역학으로, 신진대사는 열역학으로 설명을 시도한 것. 이는 하나의 공통된 방향 없이 우후죽순이었던 생물학의 나아갈 방향성을 제시하고, 분자생물학의 시대를 연 과학자들의 사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리는 유기체 내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새로운 유형의 물리학 법칙을 기꺼이 찾아야 한다. 혹시 그 법칙을 비물리학적인, 아니 심지어 초물리학적인 법칙이라 불러야 할까?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새로운 원리는 전적으로 물리학적이다. 그 원리는 다름 아닌 양자이론의 원리라고 나는 믿는다.
- 에르빈 슈뢰딩거의《생명이란 무엇인가?》중에서
1948년, 천재 수학자인 존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 1903-957)은 컴퓨터 이론의 선구자답게 유기체처럼 자기 증식하는 ‘자기복제 자동장치 이론(Theory of Self-Reproducing Automata)’을 발표했다. 생물체가 자기 증식하는 과정이 생물체를 구성하는 물질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 말하자면 생명현상의 핵심인 신진대사와 복제가 논리적으로 분리될 수 있다고 본 셈이다. 폰 노이만에 의해 신진대사를 할 수 없지만 복제는 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로 유기체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폰 노이만의 아이디어는 40년 가까이 생물학자나 컴퓨터 과학자들의 관심권 밖으로 크게 밀려나 있었다. 생물과 무생물을 구별하는 특성의 하나인 증식기능을 기계로 실현할 수 있다는 폰 노이만의 이론은 1987년 인공생명(A-life)이 새로운 학문으로 발족한 것을 계기로 생명의 본질에 관한 연구에 불을 붙여 놓는다.
생물학자들은 생명을 여러 각도에서 정의했으나 모두 불완전하고 약점을 지니고 있다. 1965년 세균의 유전현상 연구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프랑스의 생물학자 자크 모노(Jacques Lucien Monod, 1910-1976)는 생명의 특질로 합목적성, 자율적 형태발생, 복제 불변성 등 세 개의 특성을 제시했다. 모노는 생명이란 어떤 계획을 부여받은 물체(합목적성)로서 자기 자신을 만들어내는 기계(자율적 형태발생)이며, 자기 자신의 정보를 복제하고 또 불변인 채로 전달하는 힘(불변적 복제)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현실의 우리에게 단지 살아 있는 특정한 생명체만이 주어져 있을 뿐이다. 이것은 생명이 문제와 우연히 만나 자기조절을 끝낸 하나의 결과물이다. 나아가 그 결과물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유전자다. 그러나 유전자는 존재하는 생명체의 기능을 설명할 수는 있다. 하지만 유전자를 아무리 조사한다고 해도 끝끝내 주어진 사태로서의 생물체로부터 도대체 생명이 어떤 문제와 만났던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이 생명체가 자기조절을 행하기 이전에 어떤 체계를 지니고 있었는지 해명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나 손쉽게 유전자가 생명체를 지배한다는 논리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이런 우리의 착오에 불을 지핀 사람이 바로 도킨스라는 탁월한 유전자 전도사였다).
반면 생명이란 동일성의 논리가 아니라, 차이의 논리로 진화한다는 원칙에 충실했던 칠레 출신의 위대한 생물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나(Humberto Maturana)는 프란시스코 바렐라(Francisco J. Varela, 1946-2001)와 함께 세계를 만드는 생명체를 ‘자기 생성 체계’, 즉 ‘오토포이에시스(Autopoiesis)’라고 정의한다. 그리스어를 빌린 이 용어는 생명체는 자신(Auto, 저절로)을, 생성(poiesis)하고 유지하는 특성을 갖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생물체의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 능력의 다른 표현인 셈.
이는《장자》에 가장 체계적인 주석을 달았다고 평가되는 중국의 철학자 곽상(郭象, 252-312)이
모든 개체들은 홀로 스스로 생기는 것
일 뿐이라고 주장한 것과 개념을 같이 한다. 결국 자기 생성 체계 속성을 가진 모든 생명체는 자율성을 갖고 스스로 자유롭게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생성한다. 이런 자기 생성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의 기적 같은 다채로움과 또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세계를 활짝 열어놓는다.
사실 다윈의 진화론은 모든 생물체들을 외부 환경에 적응해야 살아남는, 달리 말하면 자연의 노예로 보는 측면이 강했다. 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이런 진화론을 뿌리부터 전복시킨다. 모든 생명체는 자기 생성의 역동성을 바탕으로 각 종마다 독특한 자신들의 감각 기관이 만들어낸 환경을 산출해내는데, 이것이 바로 생명체가 갖고 있는 인지 활동의 본질이라고 이들은 주장한다.[6]
이로부터 우리는 그들이《이기적 유전자》의 저자이자 진화생물학자인 도킨스의 '유전자 결정론'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도킨스의 생명체는 유전자에 의해 지배되는, 다시 말해 유전자가 만든 생존 기계인 ‘헤테로포이에시스(Heteropoiesis, 타자적 생성)’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7]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개념이 발표될 1972년 당시, 대부분의 생물학자들은 생명체가 환경과 무관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마투라나와 바렐라의 오토포이에시스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생명의 비밀 탐구 계기를 마련해준 책으로 슈뢰딩거의《생명이란 무엇인가?》로 꼽았던 프랜시스 크릭과 제임스 왓슨(James Dewey Watson). 1981년 생명의 신비 DNA가 이중나선 구조를 띄고 있다는 것을 발견해 노벨상을 수상한 그들은 자기증식, 유전과 진화, 신진대사를 생명의 본질로 제시했다. 한마디로 생명은 자기를 복제하는 시스템이라는 것. 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신비를 직접 목격함과 동시에 그 당위성을 믿게 된 배경에는 그 흔들림 없는 구조의 아름다움이 있었고, 더욱 중요한 것은 구조가 기능까지 명시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DNA의 이중나선은 서로 상대방을 복제한 ‘상보적’ 염기 서열 구조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중나선이 풀리면 두 개의 가닥, 즉 플러스 가닥과 마이너스 가닥으로 나뉜다. 플러스 가닥을 모체로 삼아 새로운 마이너스 가닥이 생기고, 원래의 마이너스 가닥에서 새로운 플러스 가닥이 생성되면 두 쌍의 새로운 DNA 이중나선이 탄생한다.
플러스 혹은 마이너스의 형태로 나선 모양의 필름에 새겨진 암호, 그것이 바로 유전자 정보다. 이것이 생명의 ‘자기 복제’ 시스템이며 새 생명이 탄생할 때 혹은 세포가 분열할 때 정보가 전달되는 시스템의 근간을 이룬다.[8] 음과 양의 우주적 조화와 상호작용은 DNA에서도 확인된 것. 이렇게 DNA 구조가 밝혀짐으로써 드디어 분자생물학 시대의 화려한 막이 올랐다.
DNA상의 암호가 세포 안에 존재하는 마이크로 단위 부품의 규격 정보라는 사실, 그리고 그것을 읽어낼 수 있는 방법 등이 차례차례 밝혀졌다. 1980년대에 들어와 DNA 자체를 소위 말하는 극소의 외과 수술만으로 자르고 붙여서 정보를 바꾸는 방법, 즉 유전자 조작 기술이 탄생하면서 분자생물학의 황금기가 도래했다.
분자의 관점에서 행해진 생명에 대한 연구가 보여준 커다란 수확은 유전자의 메커니즘에 대한 탐구이다. 슈뢰딩거는 생명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핵심은 유전자에 대한 이해와 유전자들의 유전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는 유전자에 관심을 가졌을까? 유전자들의 어떤 특별한 능력은 유전자들을 통해서 생명체의 질서를 한 세대로부터 다음 세대로 단순히 넘겨주는데 있다. 이뿐만 아니라 진화 과정에서 유전자의 질서는 더욱 강화된다.
물리학자의 관점에서 보면,
질서가 생겨나는 생명 현상은 일종의 기적과도 같다.
물리학에 따르면, 모든 현상은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엔트로피의 증가는 질서의 감소, 즉 무질서의 증가를 의미한다. 간단히 말하면 모든 현상들은 복잡해지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것. 따라서 유전자들도 세포를 구성하는 일부이고, 세포를 만드는 것은 분자들이다. 분자들은 물리학 및 화학의 법칙으로 설명되기 때문에, 결국 세포도 물리학과 화학의 법칙을 따라야만 할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가정과는 반대로
유전자들은 (물리학과 화학의 법칙에 반하여) 어떻게든 질서를 유지하고 그 질서를 계속 보존해 나가고 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안타깝지만 통계물리학은 살아 있는 생명체 속에서 소수의 원자들이 내어 놓는 뛰어난 질서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9] 이에 대해《공간, 시간, 그리고 신성》의 저자이자 실재론적 철학자인 새뮤얼 알렉산더(Samuel Alexander, 1859-1938)는 이렇게 말했다. “역학적 반응과 화학적 반응만을 알고 있는 자는 생명에 대해 예측할 수 없다.”
슈뢰딩거 역시 “생명은 이 가운데 특히 유별난 예인 것 같다. 생명은 질서가 무질서로 전환하는 경향에만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유지되고 있는 질서에도 부분적으로 근거하는 물질의 질서 정연하고 규칙적인 현상인 것 같다”라고 했다.[10] 그리고 “생명을 가진 물질은 지금까지 확립된 ‘물리법칙들’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동시에 여태껏 알려지지 않은 ‘다른 물리법칙들’도 포함할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가 도출된다”고 했다.[11] 덧붙여 “결과적으로 우리는 유전물질이 분자라는 설명 말고 다른 대안이 있을 수 없다고 마음 놓고 단언해도 좋다. 물리학적 측면에서 유전의 영속성을 설명할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이야기한다.
생명의 본질은 우리를 만들고 있는 원자들이나 단순한 분자들에 있는 게 아니다. 이 물질들이 결합되는 방식에 있다. 인체를 구성하는 화학 물질의 총가치가 97센트라는 둥 10달러라는 둥 하여간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주장의 글을 종종 읽을 수가 있다. 돈으로 친 우리 육체의 가치가 그것밖에 안 된다니 서글프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육체를 가장 기초적인 부품으로 환원시켰을 때의 이야기이다.
육체의 대부분이 물이다. 그까짓 물, 어디서나 쉽게 거저 얻을 수 있다. 탄소는 석탄의 형태로 있을 때 어느 정도의 값이 나간다. 우리 몸에 들어 있는 칼슘은 또 어떤가? 푼돈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분필이다. 단백질에 들어 있는 질소 역시 값도 없는 공기의 질소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 피는 때로 생명의 동의어지만, 혈액에 들어 있는 철이라고 해야 녹슨 못과 다를 바 없다.
우리가 좀 아는 바가 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 몸을 구성하는 모든 원자들을 큰 양재기에 쏟아붓고 주걱으로 슬슬 저으며 섞어서 생명이 만들어지는가 보려 했을지 모른다. 그럴 마음이 있으면 얼마든지 구해다가 마냥 섞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손에 남는 것은 원자들의 아무 재미없는 혼합물일 뿐이다. 무슨 다른 결과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 칼 세이건의《코스모스》중에서[12]
물리적인 법칙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동시에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물리법칙을 따르는 생명체만의 독특한 특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창발성(Emergent property, 떠오름 현상)
이다. 이는 하위 계층(예: 구성 요소인 단백질)에서는 없던 성질이 상위 계층(예: 구성물인 사람)에서만 자발적으로 갑자기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다시 말해 부분에는 없던 고차원적 질서가 전체에서는 나타나는 것. 슈뢰딩거는 이를 “생명체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질서로부터 질서’ 원리에 많이 근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따라서 창발성이란 어떤 계의 개체의 구성요소에 대한 지식만으로는 그 계를 예측해 낼 수 없는 어떤 특징을 말한다.[13]
사람을 예로 들면 가장 복잡한 창발성에는 감정, 지능 및 뇌 기능의 또 다른 면 등을 포함하는 중추신경계를 신경세포 각각의 특징을 이해한다고 해서 예측해낼 수 없는 것을 말한다(몸이 가진 많은 복합기능은 그 몸의 각 구성 부위가 가지는 특징들 하나하나로부터 예측할 수 없다). 한마디로 창발성은 ‘갑자기 출현(Emergence)’하는 특성인 것. 이는 양자역학에서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는 ‘불확정성의 원리’를 떠올리게 한다.
이런 특성 때문에 원자나 분자 혹은 유전자가 생명의 본질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 창발성은 모든 생명 현상의 가장 일반적인 특징이기 때문에 생물학에서는 아주 중요하다. 하지만 이 현상의 근거를 과학적으로 밝히는 일은 현재로서도 어려운 일이다. 아울러 생명체에 대한 분류를 신중하게 다루지 않으면 범주의 오류를 범하기 쉬운데, 이 역시 생명체만이 갖는 독특한 창발성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 물질이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질이 무엇을 하고 움직이고 환경과 물질을 교환하는 등의 일을 할 때, 그리고 비슷한 상황과 조건에서 무생물체가 견뎌내리라 기대할 수 있는 기간보다 더 오랫동안 견뎌낼 때, 우리는 그 물질이 살아있다고 한다. 살아 있지 않은 체계를 분리하거나 또는 일정한 환경에 놓아두면 여러 종류의 마찰 때문에 그 체계에 나타나던 모든 운동은 대개 곧 멈추게 된다.
전기나 화학 포텐셜(Potential)[14]의 차이는 없어지게 되고, 화합물을 만드는 경향이 있는 물질들은 화학반응을 일으켜 그것을 이루게 되며, 온도는 열전도에 의해 균등해진다. 그런 다음 체계 전체는 변화가 없는 불활성 물질 덩어리로 바뀌어 버린다. 아무런 관찰 가능한 사건도 생기지 않는 영원의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 물리학자들은 이것을 ‘열역학적 평형상태’[15] 또는 ‘최대 엔트로피’[16] 상태라고 부른다.[17] 실제로 무생물체는 보통 매우 빠르게 이러한 상태에 이른다.
반면 무생물체와 달리 생명체가 그토록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까닭은 그것이 ‘평형’이라는 불활성 상태로 빠르게 변하는 현상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명체인 인간은 최대 엔트로피 상태, 즉 죽음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이 걸린다. 그래서 인간이 체계적인 사고를 하게 된 초기부터 비물리적이고 초자연적인 어떤 특수한 힘(생기, 활력)이 유기체에 작용한다고 생각했고,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그러한 주장을 하고 있다.
살아 있는 유기체는 어떻게 그런 현상(최대 엔트로피 상태)에서 벗어나 있는 것일까? 분명한 답은 먹고, 마시고, 숨 쉬며, 이화작용(Catabolism)과 동화작용(Anabolism)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대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대사(Metabolism)의 어원인 ‘메타발레인(Metaballein)’[18]은 ‘교환’이나 ‘변화’를 뜻한다.
그러면 음식에 포함된 어떤 귀중한 것이 우리를 죽음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걸까? 자연에서 진행되는 모든 일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현상을 동반한다. 따라서 살아있는 생명체는 계속해서 자체 내의 엔트로피를 증가시켜 죽음에 이르는 최대 엔트로피의 위험한 상태로 다가가는 경향을 나타내게 된다.
그러므로 생명체는 환경으로부터 계속하여 음의 엔트로피를 얻어야 죽음에서 멀리 벗어나 살아갈 수 있다. 생명체가 먹고사는 것은 바로 '음의 엔트로피'이다. 또한 덜 역설적으로 말해 대사작용의 핵심은 유기체가 살아가는 동안 생성할 수밖에 없는 모든 엔트로피로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19] 결국
생명체는 환경으로부터 ‘질서’를 얻어 내어 생명을 유지하는, 즉 끊임없이 대사를 반복하는 시스템인 것이다.
그 시스템이 멈추면 생명활동도 멈추게 된다.
그러면 질서를 얻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무질서로부터 질서’를 만드는 통계 메커니즘과 ‘질서로부터 질서’를 만드는 새로운 방법이다. 그런데 슈뢰딩거는 생명체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질서로부터 질서’ 원리에 많이 근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이는 생명은 ‘현존하는 질서 자체를 유지하는 능력'과 '질서 정연한 현상을 새로 창출하는 능력'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말이 된다.[20]
인간을 포함해 고등동물이 먹고사는 질서의 종류, 즉 음식물로 이용되는 다소 복잡한 유기화합물(Organic Compound)인 단백질·탄수화물·지방 속의 매우 잘 정리된 물질 상태에 대해 우리는 충분히 알고 있다. 고등동물은 음식물인 유기화합물 속에 들어 있는 질서를 이용한 뒤 분해된(대사된) 형태를 자연계에 되돌려준다.
그러나 완전히 분해된 상태로 되돌려주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식물이 그것을 이용할 수 있다. 물론 식물은 태양빛으로부터 가장 강력한 음의 엔트로피 공급을 받는다. 이러한 생명의 특징에 대해 슈뢰딩거는 시계에 비유해 설명했다.
나는 생명체의 가장 뚜렷한 특성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자 한다. 첫째, 다세포 유기체에서 톱니바퀴(염색체)들이 진기하고 흥미로운 분포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개개 톱니(유전자)는 인간의 조잡한 작품이 아니고 신(자연의 법칙)이 양자역학의 법칙을 따라 이룩한 가장 멋진 걸작이라는 사실이다.
– 에르빈 슈뢰딩거의《생명이란 무엇인가?》중에서[21]
‘생명이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은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닿아 있다. 슈뢰딩거가 알고자 했던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이미 히포크라테스가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생명은 움직임’이다. 생명이란 구성요소가 모여 생긴 구성물이 아니라 구성요소의 흐름, 즉 움직임이 유발하는 효과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구성요소인 물질을 먹고 대사된 물질을 내놓는다.
다시 말해, 1년 전과 1년 후의 우리는 물질적으로는 다른 사람이다. 거의 다 바뀐다. 피부와 근육뿐 아니라 뼈와 치아도 바뀌어 있다. 만물의 본질은 움직임이고 그와 함께 시간이 시작되었다. 생명이라는 과정은 어디까지나 시간의 함수이며 그것을 거꾸로 되돌리기란 불가능하다. 우리의 생명은 수정란이 생긴 그 순간부터 행진을 시작한다. 이는 시간의 축에 따라 흐르는, 과거로 되돌릴 수 없는 일방통행의 과정이다.
지금은 바이오테크놀로지를 활용해 생명 부품을 인공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시험관 안에서 혼합했을 때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느냐, 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여기서 부족한 것은 생명에 있어서의 ‘시간’이라는 관념이다. 타이밍과 부품은 시간을 따라 조직화된다. 각각의 시점에서 발생하는 그 모든 것은 그 순간에만, 단 한 번만 나타나는 현상이며 불가역적이다.
이를 억지로 헤집어서 재프로그래밍 단추를 누르려는 것이 바로 복제 기술이며, ES세포(Embryonic Stem cells, 만능세포) 기술이다. 시간에 조작을 가한다면 우리는 그만큼 어딘가에서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그것이 생명의 본질이기 때문이다[22](우리가 시간을 조작할 수 없듯이 생명을 조작할 수 없다는 뜻이다. 조작한다면 우리가 상상해본 적 없는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양심 있는 학자들이 유전자변형 생명체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분자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생명체란 마이크로 부품으로 이루어진 플라스틱 조립식 장난감, 즉 분자 기계에 불과하다. 데카르트가 생각했던 기계적 생명관의 궁극적인 모습인 것. 만약 생명체가 분자 기계라면 생명체를 정교하게 조작함으로써 생명체를 개조하여 ‘개량’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당장 그 수준에 이르지는 못하더라도… 스티븐 호킹의 말처럼 유전자 기술로 창조된 진일보한 생명체는 지금으로부터 천 년 후쯤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생명에는 부품을 끼워 맞추는 것처럼 설명할 수 없는 중요한 특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생명과 생명 아닌 것을 구별할 수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바로 ‘움직임’이다. 2,500년 전 히포크라테스가 “생명은 움직이다”라고 말한 것을 과학적으로 밝혀낸 사람이 있다. (DNA 구조가 발견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세상을 떠난) 그의 이름은 루돌프 쇤하이머(Rudolf Schoenheimer, 1898-1941). 독일의 생화학자인 그는 생명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
동적인 평형 상태(Dynamic Equilibrium)
에 있음을 세계 최초로 밝힌 과학자였다. 우리가 섭취한 음식물 분자는 눈 깜짝할 사이에 온몸으로 퍼져 잠시 잠깐 여유롭게 그곳에 머무르다 다음 순간에 몸에서 빠져나간다는 것을 증명했다. 즉 생명체인 우리 몸은 플라스틱으로 된 조립식 장난감처럼 정적인 부품으로 이루어진 분자 기계가 아니라 부품 자체의 역동적으로 흐르는 움직임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다.[23]
이에 대해《생물과 무생물 사이》,《동적평형》의 저자 후쿠오카 신이치(福岡 伸一)는 이렇게 표현했다. "생명은 외발자전거의 숨가쁜 균형"이라고.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생명은 ‘흐름’이며 우리 몸이 그 ‘흐름이 잠시 머무르는 상태’라면 환경은 생명을 둘러싸고 있는 게 아니다. 생명은 자연환경의 일부, 혹은 자연환경 그 자체인 것이다"라고. 흐름은 움직임이며, 동시에 에너지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생물과 무생물로 구성된 하나의 초유기체, 즉 거대한 생명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앞서 <[운동 안내서] 춤추는 에너지 실: 운동하는 입자>에서 만물을 이루는 기본 단위가 점 입자가 아닌 입자 사이의 정보가 얽혀 연결된 빛보다 빠른 ‘진동하는 끈’ 혹은 '춤추는 에너지 실'일 가능성을 양자역학이 제시한다고 했다. 첼로의 줄이 다양한 모양으로 진동하는 것처럼 에너지 실도 다양한 모양으로 진동한다고 했다. 그 모습은 마치 창발적으로 탄생한 음악과 춤 같을 것이다. 비록 생명이 무엇인지 완벽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진동하는 분자와 움직임으로부터 음악과 춤이 탄생한다는 것으로 생명이 무엇과 비슷한지는 묘사할 수 있다.[24]
1778년 감성이 충만한 모차르트의 머릿속에서 시작된 추상적 패턴인 소나타 E단조의 창발적 현상은 어떤 연주회나 연주자보다 오래 지속되며, 그것을 구현할 악기가 있든 없든 또는 그것을 악보에 옮겨 적을 악필이 있든 없든 존재한다. 햇빛과 바람에 숨을 맡기고 공기의 냄새를 맡으면서 몸이 가는 대로, 땅을 지그시 밟으며 북장단에 맞추어 추는 창발적인 민속춤 역시 계승자가 있든 없든 존재한다.
어쩌면 우리 인간이라는 생명체는 음악 그리고 춤과 가장 많이 닮았는지도 모른다. 하여, 우리는 단순히 원자들이 모여 만들어진 물질적 악기가 아니라, 마치 음악과 춤처럼 원자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출현한 것이다. 추상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재하는, 무한한 가능성과 변화의 힘을 지닌 창발적 패턴일 것이다.
그것이 광대무변한 우주에서 생명의 별 지구 외에 다른 생명의 별을 (비록 기술 문명이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몸이라는 극장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릴 때까지, 원자라는 관현악단들이 연주하는 살아 있는 멜로디와 그에 맞춰 무용수가 추는 살아 있는 춤, 그것이 우리 인지도 모른다.
음악 소리와 춤이 그렇듯, 모차르트와 아인슈타인 그리고 호킹이 그렇듯, 우리도 언젠가는 사라진다. 그러나 춤과 음악적 구성의 추상적 구조처럼 생명의 시공간 좌표와 발현 패턴은 영원할 것이다. 우리를 이루는 원자와 아원자 성분들도 여러 세대 동안 수없이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다가, 마침내 우주가 다시 태초의 절대적 무로 돌아갈 때 그 고요함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버릴 것이다.
■ 다음 연재 글: <운동 안내서>는 매주 1회 업데이트됩니다.
[1부 – 안내서에 대한 안내서: 움직인다는 것] 1장. 움직인다는 것_태초에 움직임이 있었으니
움직임과 몸의 탄생
[운동 안내서] 삶을 변화시키는 힘! 운동이란 무엇인가?
[운동 안내서] 우리는 무엇인가? | "예전보다 운동을 많이 합니다"
[심플 운동] #살아있다 하여 비울 것 그리고 채울 것!
[완벽한 몸만들기] 17년 만에 다시 쓰는 몸만들기와 운동 이야기
[완벽한 몸만들기] 몸만들기와 모든 운동 시작 전 꼭 알아야 할 사항들
당신 몸속 작은 우주 이야기: 37조 개 움직임과의 만남
[1] 저자 주: 양자역학의 불완전함을 보이기 위해서 슈뢰딩거가 고안한 사고 실험
[2] 전자책, 이기상의《글로벌 생명학: 동서 통합을 위한 생명 담론》중에서
[3] p41, 전자책, 앨런 라이트먼의《엑시덴탈 유니버스》
[4] “27. 생명의 논리란 무엇인가?”, 강신주의《철학 VS 철학: 동서양 철학의 모든 것》서양 편 중에서
[5] <IBS 연구진, 숙주 역이용하는 바이러스 생존 원리 찾았다> 동아사이언스, 2020.6.5
[6] <인간의 새로운 정의는? ‘서로 돕는 동물’> 프레시안, 2014.4.8
[7] “27. 생명의 논리란 무엇인가?”, 강신주의《철학 VS 철학: 동서양 철학의 모든 것》서양 편 중에서
[8] p5-6, 후쿠오카 신이치의《생물과 무생물 사이》중에서
[9] p286, '뚜렷한 대조', 푸엥카레, 슈뢰딩거, 캐넌의 《과학과 방법 / 생명이란 무엇인가? / 사람몸의 지혜》 중에서
[10] p275, '질서에 바탕을 둔 질서', 푸엥카레, 슈뢰딩거, 캐넌의 《과학과 방법 / 생명이란 무엇인가? / 사람몸의 지혜》중에서
[11] p274, '델브뤼크 모델로부터 얻은 일반적이며 뚜렷한 결론', 푸엥카레, 슈뢰딩거, 캐넌의 《과학과 방법 / 생명이란 무엇인가? / 사람몸의 지혜》중에서
[12] p263, 칼 세이건의《코스모스》중에서
[13] p8, 디 언그로브 실버톤의《인체생리학 5판》중에서
[14] 저자 주: 입자가 공간의 어느 위치를 차지함으로써 생기는 에너지
[15] 저자 주: 물질이나 에너지의 거시적 순 흐름(Net Flow)이 부재한 것
[16] 저자 주: 열역학적 평형상태가 되면 엔트로피 증가는 멈추게 된다. 이를 최대 엔트로피 상태라고 한다.
[17] p276, '살아 있는 물질은 평형으로의 쇠퇴를 피한다', 푸앵카레, 슈뢰딩거, 캐넌의《과학과 방법 / 생명이란 무엇인가? / 사람 몸의 지혜》 중에서
[18] 저자 주: 어원적으로 접두사 meta-(change, 변화)와 어근 ballein(throw, 던지다)이 합쳐진 것으로 불필요한 것을 던져내고 필요한 것을 받아들여서 변화한다는 의미다.
[19] p277, '생명은 ‘음陰의 엔트로피’를 먹고 산다', 푸앵카레, 슈뢰딩거, 캐넌의《과학과 방법 / 생명이란 무엇인가? / 사람 몸의 지혜》중에서
[20] p130, ‘생명은 어떻게 동적질서를 유지하는가?’ 후쿠오카 신이치의《생물과 무생물 사이》중에서
[21] p291, '시계와 유기체의 관계', 푸앵카레, 슈뢰딩거, 캐넌의《과학과 방법 / 생명이란 무엇인가? / 사람 몸의 지혜》중에서
[22] P137-138, 후쿠오카 신이치의《동적평형》중에서
[23] p6-7, 후쿠오카 신이치의《생물과 무생물 사이》중에서
[24] p126, 전자책, 커트 스테이저의《원자, 인간을 완성하다》중에서
By 푸샵 이종구: <남자들의 몸 만들기, 2004>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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