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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하 Apr 01. 2021

외로운 순간에 꺼내 들 책이 생겼다.

<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생각의 마침표] 북 에세이 01. <시선으로부터,>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유 퀴즈에도 출연했던 셀럽급 작가의 2020년 베스트셀러를 특별히, 발견이라고 하긴 어렵다. 그럼에도 내가 <시선으로부터,>에 대해 쓰고 싶었던 건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 때문이었다.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331)".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가부장제와 가학적인 남성들을 혐오의 대상으로 삼는 것도, 현실에는 심시선이 없다 불평하며 이런 가족 자체가 판타지라고 포기해버리는 것도 아닐 것이다. 김영수 문학동네 편집자는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을 산 여성과 그 영향을 받은(두 가족이 합해진) 한 가족이 가부장적인 사회에 반해 어떤 방식으로 살아나갈 수 있을지 보여준 점이 공감을 샀을 것'이라고 말한다. 나도 무척 신나게 읽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여자들끼리만이 아니라 남자들과 함께 읽고 싶다고 생각했다. 가해자의 추악함과 피해자의 상처에 집중하기보다 비극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는 용기를, 시대적 한계 속에서 용기 있게 살아온 '사람'이 주는 든든함으로 읽고 싶었다. 정세랑 작가의 어려운 낙관이 다시 한번 상기되는 순간이다.


"쉬운 낙관은 거짓말이 될 것이고 곧바로 절망을 택하는 것 역시 싸움을 포기하는 것이기에 무책임한 선택일 수 있다. 그렇기에 세계를 똑바로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결국 '어려운 낙관'을 이야기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이상적인 세계에 대해서 쓰면서 그렇게 멀리 한번 가보면, 한 걸음이라도 그런 시계를 현실로 가까이 끌어당기게 되지 않을까"
- 2020 서울 작가 축제 SIWF In Our Devastated World 정세랑 작가 폐막 강연 중 발췌 -





1. 나를 구한 한 마디


각 챕터는, 미술 작가였고 생전에 많은 글을 썼던 심시선의 인터뷰, 미술학부 졸업 축사, 에세이 발췌 등으로 시작한다. 예술, 문화계, 재능, 창작, 그리고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의 흔들리는 마음을 다독이는 이야기들이 여러 번 나를 구했다.


"내가 지켜본 바로는 질리지 않는 것이 가장 대단한 재능인 것 같다. 뛰어난 데 질린다면 하지 않는 것이 낫고, 당장 뛰어난 것 같지는 않지만 하고 하고 또 해도 질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도해볼 만하다(289).”


“추상에도 기웃, 극사실주의에도 기웃, 민중미술 평론하다 포스트모던으로 넘어가는 갈지자 커리어도 괜찮다. 내가 그 사람들을 다 좋아했다. 그것만이 나의 일관성이었다(308)"


평생 할 수 있는 일을 정하는 기준이 당장의 반짝임보다는 오랫동안 질리지 않을 수 있는지라는 말이 이제는 이해가 되며, 넘치는 호기심으로 경력이 갈지자를 그릴 때 실은 그게 나라는 걸 받아들이고 그 지점에서 뻗어나가야겠다 생각했다.


가장 오래 머무른 장면은, 오랜만에 작가로 복귀하는 후배가 여유 없는 마음에 웅크리고 있을 때 시선이 건넸던 말을 회고하는 씬이다.


그런데  이것과 똑같은 것을
한 네 배 크기로
그려볼 생각은 없어요?


“그 아무렇지 않은 말이 제 안쪽 어딘가를 건드렸습니다. 웅크리고 있었던 거예요... 여유가 없었으니까. 내가 화가라는 걸 잊고 있는 시간이 더 길었으니까. 이후로도 종종 점검합니다. 내가 나 자신을 작은 틀에 가두고 있지는 않나.(268) - 화가 황민하가 기억하는 심시선<그때 나를 구한 한마디>”



2. 나에게 맞는 무해함


애잔한 남자들만이
심시선의 가계에
존재할 수 있었는지도 몰랐다(162)

나는 이 ‘애잔함'을, 굳이 이기겠다 힘자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표현하는 고마움과 미안함의 감정으로 읽었다. 애잔함을 느끼는 연유는 다양할 수 있다. 누군가의 배경이 되어 줄 수 있는 그릇이 큰 사람이어서, 오랫동안 받은 (가정)교육으로 본성(이라 여겨지는 것)을 고쳐먹어서, 아니면 그저 어쩔 수 없어 참고 있는 것 일지라도.


이 대단스러운 집안에 조화로운 배경 같은 존재로 소개되는 태호(명혜의 남편)가 시선의 제사에서 만큼은

"당신 제법 스마트했네, 아빠한테 졌잖아, 형부 대단해요... 그런 말들을 듣고 싶어서(274)" 따뜻한 도넛 배달을 위해 자전거 훈련을 하는 장면은 기분 좋은 장면 중 하나이다. 가끔 알아채 주면 다시 좋은 배경으로 돌아갈 수 있는 이 집안에 딱 맞는 남자이다.


기대대로 되지 않았을 때 꺾여버리는 사람(52)으로 소개되는 상헌(화수의 남편)은 가장 보통의 한국 남자 같다. "상황이 나쁜데 섹스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 화수에게 욕망의 대상이 되고 싶었다. 삶의 대상이. 그 요구를 이기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하는 법을 찾지 못해 자꾸만 덜 아문 곳을 덧나게 했다(301)." 이런 상헌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알아서 의젓한, 조금 더 품을 수 있는 남자가 되기 바라는 마음이 든다.

   

독일에 일을 처리하러 간다고 가서는 돌아오지 않은 시선의 첫 남편 요제프 리(194). 다정하고 무해하지만 울타리가 되려고 하지는 않는다. 편하고 친구 같은 대신 책임도 져주지 않는다.


이 집안의 유일한 아들인 명준은 공개적으로 모질이 취급을 받는데, 섭섭함이야 말로 못난 감정이라고 밟아 없애 준 누나들(230)과 작은 요크셔테리어가 겁먹을까 봐 납작 엎드려 몸을 낮추고 기다리는 큰 개를 보고 '그런 남자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엄마(317)를 둔 덕이다. 거기에 한술 더 떠 '수컷이 그렇게 젠틀할 리 없다' 생각하다 결국 수컷이라는 걸 알고 '테스토스테론 탓하지 말아야겠구나(317)'라고 결론짓는, 사실 알고 보면 애초에 싹수가 있었던 남자인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똑똑해도, 다정하고 사려 깊은 성품을 타고났다 해도 여자들이 보는 것과 남자들이 볼 수 있는 것은 다른 것 같다. 이건 뭐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만나보니 지금껏 그래 왔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그냥 남자(남편)와는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하면 된다고 심플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생각보다 섬세하게 감각하고, 진지할 줄도 아는 남자들은 존재한다.

그리고 기억하자.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구하면
실패할 수박에 없다.
우리가 인생에 간절히 필요로 하는 모든 요소를
한 사람이 가지고 있을 확률은
아주 낮을 테니(21).


나는 과연 결혼을 매 순간 갱신하는 계약으로 생각하는(305) 남자와 연애하고 가족을 만들 수 있을까?



3. 오늘 하루는 어땠나요?


누구에게나 삶은 어렵다. 어렵지만 그래서 재미있다 생각하지만 요즘 들어 부쩍 위로가 필요한데, 그때마다 각자의 자리에서 꿋꿋이 살아가고 있는 심시선 가족들을 꺼내보고 싶다.  


책의 첫 페이지는 가계도로 시작한다(출처 : 알라딘)


난정은 쓰는 게 대단한 것 같지만 웬만큼 뻔뻔한 인간이면 다 할 수 있다며 허섭스레기들 사이에서 길을 찾고 진짜 읽을 만한 걸 찾아내는 게 더 어려운 거라 말하는(166), 시선에겐 아들보다 영특한 며느리이다. 원래도 책을 좋아했지만 딸 우윤이 아팠을 때 끝없이 읽는 것으로 자기를 보호하기 시작했고, 남편을 자신이 던지는 생각이 재밌게 튀어 돌아오는(237) 만만하고 괜찮은 벽이라고 생각한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에겐 기본적으로 잔인함이 내재되어 있어. 함부로 굴어도 되겠다 싶으면 바로 튀어나오는 거야(235)."

"미술관, 박물관 그 두 공간만큼 제국주의적인 데가 또 어디 있다고(234)"


통찰력이 있고 단단한 편이지만 딸에게는 한 없이 약한 엄마인 난정을 보며 평소 내 생각들을 많이 정리할 수 있었다.


매일 새로운 음악을 하나만 발견해도
좋은 하루라고 믿고 있었다(75).

이 책에서 가장 기분 좋아지는 문장이다. 사람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사람(53)인 지수는 직업을 몇 번 바꿔 디제이가 되었다. 스스로를 꾸준한 데가 없다고 말하지만 친구의 표현대로 그녀는 열려 있는 사람이라 변화에도 적극적인, 튼튼하게 활짝 열리는 창문이나 공기가 잘 통하는 집(204) 같은 사람이다. 학창 시절 학년이 바뀔 때마다 여지없이 오락부장을 맡았고, 다친 언니를 위해 호방한 문지기처럼 지키고 서서 사람들의 관심을 싹둑싹둑 썰어내주는(56), 하와이에서 자신에게 무지개를 찾아주고 싶어 하는 섬사람들의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해 실망스러워도 실망하지 말아야지 다짐하는 사람이다(285).


명혜를 보면서는 엄마를 떠올렸다. 시선의 죽음 앞에서도 짧고 강하게 운 다음 완벽한 상주가 되는(33) 언제나 조금 강직한 느낌을 주는 명혜(84)는 사위 상헌의 표현대로 무섭긴 해도 어려운 사람이 아니었다(300). 시선의 딸답게 남편 태호 가족에게 인사 갔을 때도 못마땅해하는 기색들을 상쾌하게 넘겨버리고는 농산물 토크를 네 시간이고 다섯 시간이고 해내서 태호 가족들의 마음을 얻은(283) 그럼 사람이다.


그리고 아이들의 이야기가 기분 좋게 흥미롭다. '참 쉽게 흡족해하는 아이(44)'로 묘사되는 규림은 친구 도영과 한빛의 사건에서 스스로를 가해와 피해의 스펙트럼에서 가해에 더 가까웠다(174)고 받아들일 줄 아는 아이이기도 하다. 하와이에서의 다이버 체험을 통해 한국에 돌아가서도 더 훈련해 산호 정원사로 이십 대를 보낼 계획을 조용히 마음속으로 다지는 청소년이기도 하다(313).



4. 모던걸이 될 수 있을까?


"할머니는 장례 같은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예'가 들어가는 단어는 사실 묶어서 싫어했다.
모던 걸. 우리의 모던 걸. 내 모든 것의 뿌리(67)."

'모던 걸'은 사전적으로는 개화 시기에 의식주, 문화와 새로운 사회적 역할을 빠르게 받아들인 여성을 이르는 말이지만, 요즘도 시대를 앞서는, 그래서 걱정을 사는, 조금은 튀는, 자신의 확신으로 사는 여자들에게 유효한 표현인 것 같다.

명혜는 인터뷰에서, 사실 어릴 땐 깨끗하고 잘 정리된 집에서 사는 전통적인 어머니를 가진 친구들을 부러워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인생에 몇 번 실패를 하고 나서, 이혼도 하고 양아버지 회사도 폐업시키고 나서 엄마가 전통적인 엄마가 아닌 게 나를 도왔구나 생각하게 되었어요. 웬만한 헛디딤에는 눈 깜짝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세속적인 기준으로 딸들을 비난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191).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행동하지만 한편으로는 다수의 범주에 안전하게 들어가고 싶은 마음, 최소한 한 명의 남자로부터는 보호받고 싶은 마음이 나를 어정쩡한 모던걸로 만든다.



5. 다음 여행지는 하와이


소설은 하와이에 씌워진 낭만과 도피의  이미지약탈과 수난의 역사교차하며 보여준다. 마치 우리한테 제주도가 그런 공간인 것처럼. 난정은 "하와이를 좋아하면 하와이에 오면  되는 거였어"라고 말하지만 나는 하와이가 궁금해졌다. 솜사탕과 도넛을 합친  같은 맛의 뜨거운 말라사다 도넛을 맛보고, 언어에 가까운 춤이라는 훌라(314) 배우고 싶다. 똑바로 직시하며 걷되 다치지 않고 경쾌하게 살아가고 싶어 졌고, 심시선 가족들이 시끌벅적 지냈던  공간 하와이에서라면  시작할  있을  같다.   





(출처 : 문학동네)

마침표를 찍지 못한 생각 하나가 남았다. 화수이다. 그녀는 사람이 사람에게 염산을 던지는 세계에 살러 오라고 할 수 없기에 아이를 낳지 않겠다 말한다. 어느 대륙, 어느 문화권에서건 투척자는 99퍼센트 남자이기에 '사람'을 '남자'로 고쳐야 한다는 지수의 말에(322) 화수의 피해자로의 머묾이 이해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우윤과 규림, 해림까지 시선에게서 뻗어 나온 가지의 끝이 되기로 마음먹었다(323)고 했을 때, 더는 어려운 낙관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무책임한 포기를 한 게 아니냐고 작가에게 되묻고 싶어 졌다. 내가 여자임에도 무조건 여자의 편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힘이 있다면 그 누구라도 지배하려 하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근본적인 물음 때문이다.


분노를 연료 삼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비웃어주고 싶었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나와 내 할머니만 알고 있다고
쏘아붙이고 싶었다(18)


시선 할머니와 화수의 비교는  폭력적일  있지만, 화수의 말대로  , 경험한 사람만이 말할  있는 비극적인  이후를 살아가는데  방식이 무척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현실에 대한 인식을 감정적 억압으로 이어가지 않고 그냥 자신을 분명하게 바라보고 알아채주면서 스스로를  돌보는 삶의 힘을 믿는다.


괴로운 방식으로 강렬했지만 가지 못할 세계에 가게 되었으니 마우어를 만난  후회가 없다(65) 말해내는 시선! 추악한 시대 속에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싶다. 살아가며 화수 같은 사람을 만날   책을 꺼내보며 지금 보다는 조금  이해해 나갈  있을 거라 믿는다. 당분간 나와  주변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자주 꺼내 읽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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