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서양에서는 철학의 양대 축으로 진리와 미를 꼽았다. 그중에서도 미(美)는 시대를 옮겨가며 종교와 예술의 대상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도 변하지 않았던 미학의 속성에는 완벽과 영속성이란 개념이 존재한다. 불완전한 인간이 완벽과 영속을 갈구하다니, 직관적으로 비극이 연상된다. 또한, 예술을 행하는 근원에는 늘 인간의 욕망이 존재했다. 욕망은 예술을 추구하는 힘이자, 동시에 불행의 씨앗이었던 셈이다. 이룰 수 없는 꿈을 생이 마감될 때까지 욕망하는 부질없는 우리의 존재.
스토아철학은 절제의 가르침으로 유명하다. 스페인 작가 마르코스 바스케스(Marcos Vazquez)는 그의 저서 『스토아적 삶의 권유』를 통해, 지혜와 절제로 설명되는 미덕(Areté)을 추구하면서도 마음의 평온인 아타락시아(Ataraxia)를 이뤄야, 진정한 행복인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에 도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복잡해 보이지만, 정리하면 나의 마음에 집중하지 못하고, 지나친 욕심으로 타인의 욕망에 춤을 추면 화를 부르기 쉽다는 것이다. 문득, 타인의 욕망에 흔들려 그림을 망쳐버렸던 나의 작은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일이다. 난 그림을 잘 그린다는 칭찬을 듣곤 했고, 미대 출신인 우리 담임 J 선생님이 그런 나를 유난히 예뻐하셨다. 어느 날 미술 시간에 그린 그림으로 사생대회에 나갈 반 대표를 뽑는 날이었다. 마침 옆 반 선생님도 잠깐 오셔서 수채화를 그리는 아이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곤 가장 마지막 줄 책상의 빈자리에 두 분이 나란히 앉으셨는데, 하필이면 바로 그 앞자리에 내가 앉아있었다. 두 분은 작은 목소리로 아이들의 그림에 대한 이런저런 품평을 하셨는데, 물론 내 그림에 대한 이야기도 하셨다.
"아, 이 그림은 좋은데, 좀 더 밝은 쪽을 채색했으면 좋겠어요."
"그런 가요? 나는 좀 어두운 쪽으로 갔으면 좋겠던데..."
두 분의 이런 말씀을 엿들은 나는 귀가 쫑긋했다. 과연, 선생님들의 대화처럼 내 그림은 엷게만 그려지고 있었지, 뭔가 강렬한 색감이 부족해 보였다. 그래서 두 분의 말씀을 듣고 그때마다 언급된 색을 몰래 더하고 더했다. 빨강, 파랑, 다시 흰색... 두 분이 희망하는 그 색들을 내가 스케치 북에 모두 더한 결과로 나온 것은, 뭘 그렸는지 모를 정도로 엉망이 된 너덜너덜하고 칙칙한 그림이었다.
두 분이 내 그림에 대해서 이야기하셨던 것인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다른 아이들의 그림에 대한 감상을 말씀하신 걸 내가 오해했을 수도 있다. 내 그림은 수채화가 아니라 온통 새카맣고 너무 덧칠해 너덜너덜한 거대한 휴지 조각 같았다. 나는 내가 원했던 색에 집중하지 못했고, 결론적으로 사생대회에도 나가지 못했다. 나의 내면에 집중하지 못하고 선생님들의 욕망에 따라 춤춰 벌어진 당연한 결과였다. 그때의 그 실망감이란....
세월이 흘러 고등학생 때 일이다. 당시 우리 학교의 미술 선생님은 정말 무서운 노총각 L 선생님이셨다. 어느 날 반 친구들이 운동장에 흩어져 풍경화를 그리는 날이었다. 학교 뒷산, 운동장, 학교 앞 건물, 우리 자신들의 모습 등등 우리는 각양각색의 그림을 그렸다. 난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문득 하늘을 그리고 싶었다. 다만 뻔한 하늘이지만 표현 방식은 좀 달리하고 싶었다. 낮에 보이는 파란 하늘이 아니라, 빛이 굴절되면서 나온 무지개색을 원래대로 다시 합치면 어떨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모든 색을 더하면 명도가 떨어져 검게 변할 것이기에, 색을 최대한 엷게 하여 여러 색을 덧칠하자는 다소 실험적인 시도를 하고 싶었다.
두 시간의 미술 시간이 거의 끝나 갈 무렵, 아이들은 운동장 스탠드에 모두 서서 자신의 그린 그림을 들고 나란히 사열했다. 선생님은 저쪽에서부터 그림을 하나하나씩 보시기 시작했고 즉석에서 점수를 주셨다. 간혹, 그림도 제대로 안 그리고 놀았던 아이들은 혼쭐이 나기도 했다. 나는 초조했다. 어찌 보면 추상화 같은 온통 무지개색만 울긋불긋한 그림을 혹시 장난쳤다고 생각하실까 봐.
마침내 선생님의 시선은 그림들을 쭉 훑다가 내 그림에서 멈췄다. 이글거리는 선생님의 눈망울은 그림을 보고 나를 보고, 또다시 나를 보고 그림을 보고... 나는 정말이지 불안해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너, 그림 들고 나와"
나는 너무 무서워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어기적 어기적 그림을 들고 스탠드 앞으로 나갔다. 혹시 따귀라도 맞는 거 아닌가 생각했다. 선생님은 내 그림을 보시곤, 다시 뒷장으로 넘겨 그동안 그렸던 내 그림을 차례로 보셨다. 그때의 조마조마했던 마음이란...
결과적으로는 난 그 수업에서 최고점인 A를 받았다. 선생님께 제출한 내 그림은 나중에 12개 반 전체를 돌아다니며 좋은 예시로 소개되기까지 했다. 선생님이 추상화 같은 내 그림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면서 A를 준 이유를 설명하셨다고 한다. 그건 바로 자기만의 색이 살아있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선생님은 내게 미대 진학을 권유하기까지 하셨다. 그림에 소질이 있었지만, 난 미대 진학의 꿈을 품을 수 없었다. 예체능 계열은 돈이 많이 든다는 이야길 알고 있었고, 또 남자아이들은 이과에 가서 취업을 해야 한다는 부모님의 바람을 잘 알고 있어 포기해야 했다.
지금도 누군가의 그림을 보면 내 인생의 앞에 소개한 두 장면이 떠오른다. 두 장면의 차이는 하나는 다른 사람의 욕망에 편승해 내 욕망을 굴절시켜 그림을 망친 일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나의 계획대로 나의 욕망을 오롯이 드러낸 것이었다. 선생님의 바람에 춤을 춘 그림은 시커먼 숯덩이가 되어 망쳐버렸고, 나의 의도로 디자인된 그림은 극찬을 받았다.
우리 삶이 어쩌면 그 하늘 그림처럼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싶다. 완벽하고 불멸의 예술 작품을 만든다는 거대한 이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 나의 내면을 잘 보며 살아가야 한다고. 또 그 내면이 외치는 대로 흔들림 없이 무엇인가를 끈질기게 고집하고 이를 시행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림과 관련해 초등학생의 나와 고교생이었던 내가 서로를 보고 웃는 모습이 떠오르는 찬란한 오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