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죽을 고비를 넘겼던 적이 딱 세 번 있다. 첫 번째는 아마도 나의 일생에서 가장 오래된 기억 중에 하나로 생각되는데, 다섯 살 때 대문 문턱에 걸려 넘어지면서 이마를 돌부리에 찍힌 일이다. 당시 우리가 살던 집은 문턱이 높은 한옥 집이었고, 나는 문턱을 위태위태하게 넘나들며, '딩동댕, 딩동댕' 하며 혼자 놀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고 한다. 넘어진 순간의 기억은 없지만, 이후 눈부시게 밝은 조명에서 내 이마에 뭔가를 만지던 그 따끔따끔했던 느낌만은 생생하다. 아마도 병원에서 이마를 꿰매는 수술을 받을 때의 분절된 기억이 아닐까 싶다. 이마가 찢어진 나는 한동안 의식을 잃었고, 어머니는 피가 철철 흐르는 나를 안고 어쩔 줄 몰라하셨다 한다.
두 번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 친구 가족들과 관악산에 놀러 갔을 때다. 그때 다들 그랬던 것처럼, 나는 관악산 계곡에서 팬티만 입은 채 아버지 친구분들의 아이들과 계곡에서 놀았다. 계곡에는 군데군데 생각보다 깊은 웅덩이들이 있어서 부모님은 우리가 놀아야 할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을 정해 주셨던 것 같다. 그러나 호기심이 충만했던 나는 하필 부모님이 가지 말라고 했던 그 깊은 물웅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심리 아닌가! 발끝이 바닥에 닿지 않은 그 웅덩이에 쭉 빨려 들어가는 공포를 느꼈다. 그런데 그곳에서 탈출은 너무 싱거웠다. 신기하게도 허우적거리는 것 대신, 나는 아주 침착하게 바닥으로 내려가 눈으로 얕은 곳을 확인한 후 엉금엉금 기어서 나왔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했다. 그 침착함이란!
세 번째 순간은 조금 그로테스크하고 초자연적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는데, 평소에도 공상을 좋아했던 나는 당시 친구 S와 좀 짓궂은 장난을 하곤 했다. 그날은 소설에서 읽었던 목 졸리는 느낌을 묘사했던 부분이 무척 궁금했던 걸로 기억된다. 그래서 나는 S에게 위험은 했지만 나의 목을 조여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예상외로 S가 좀 세게 그리고 좀 길게 목을 졸랐고, 나는 그대로 기절했다. 그 직후 나는 소위 유체이탈 현상을 경험했다. 내가 기절하자 주변 있던 친구들은 나를 둘러싸고 뺨을 때리고 물을 뿌렸다. 중요한 것은 이 모습을 또 다른 내가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친구들에게 '난 괜찮다, 아무렇지 않다'라고 계속 말을 건넸지만, 어쩐지 친구들은 내 말을 듣지 못했다. 그것도 모자라 몸을 빠져나와 비스듬히 붕 떠서 바닥에 쓰러진 내 육체를 내려 보고 있는 게 아닌가! 당황한 내가 여기 있다고 크게 외쳐도, 친구들은 아무도 나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길 수 초. 그러다가 다시 나는 내 몸 안으로 서서히 들어갔고, 곧 깨어났다. 잠깐 사이인 4~5초쯤으로 느껴졌지만, 이미 20분도 넘게 시간이 지났다는 걸 알았다. 그때 친구 S는 혹시 내가 죽은 게 아닌가 생각하며 파랗게 질렸다.
스스로 경험한 유체이탈 현상 때문에 나는 처음으로 영혼의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영혼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은 물질로 만들어진 우리의 태생적인 한계를 뛰어넘는 일이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생각보다 그리 간단치 않다. 영혼을 믿는다는 것은 주변의 초자연적 현상을 인정하는 것이다. 영혼을 인정하는 순간, 이승과 저승의 존재, 천당과 지옥의 유무, 사후 세계는 물론 운명을 심판하는 신의 존재의 인정까지 광범위하게 확장되기 때문이다. 나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직접 경험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납득할 수는 없었다.
초자연적 현상은 과학적 근거를 두거나, 사기극으로 밝혀지는 경우가 많다.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관상학과 사주팔자도 결국은 오랜 세월 인간의 운명을 집대성하고 확률 상으로 분류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초능력도 마찬가지다. 80년대 언젠가 전 국민이 숟가락 한 개를 들고 TV 앞에 앉아 초능력자 유리 갤러의 구호에 맞춰 숟가락이 휘어지는지 안 휘어지는지 뚫어지게 바라봤던 그 장면도 사실은 사기극이었다. 사기극이 공중파를 타고 전국을 강타했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실소를 자아내는 일이다. 또, 전국의 여고생들이 분신사바를 외쳤던 그 장면들은 어떤가? 가만 보면 초능력이 자체보다는 고된 현실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그것을 믿게 만든 것 아닐까?
과학이 발전해 A.I. 가 모든 것을 해 준다는 지금도 사람들이 초능력이나 운명을 진지하게 믿고 있다는 점은 재미있다. 소위 사회의 지도층들이 무속에 빠져 있다는 사실도 그러하다. 몇 년 전에 손바닥에 임금 왕(王)자를 쓰고 나와 TV 토론을 하던 사람이 실제로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런 것을 보면 초능력과 운명의 힘에 경도(傾倒)되는 것이, 교육의 정도, 경제력, 나이를 초월해 만연한 것 같다. 자신의 운명이 신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한계를 뛰어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수많은 신화와 신앙을 낳았다. 그런 허황된 신화와 신앙의 중심에는 더 좋은 세상에 인간답게 살아보고자 하는 욕망이 엿보인다.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의 『신곡』이 좋은 예다. 사후에 천국으로 가는 길에 만나는 수많은 에피소드들, 그러나 『신곡』에서 보여주자 했던 것은 사후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사후세계를 배경으로 인간이 진정 갈망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췄다. 인간의 삶이 더 중요하다. 욕망만 품은 채 움직이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것은 그 유체이탈 사건 즈음이었던 것 같다. 비현실적 공상에 빠져 있던 내게 유체이탈 사건은 아무런 일도 만들어 주지 않았다.
둘째 아들은 천재적인 절대음감을 가지고 있다. 들은 걸 그대로 악기로 재현하는 능력이 경이롭기까지 하다. 가끔 내가 아들에게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물어보면, 녀석은 별거 아니란 듯 아주 덤덤하게 그냥 음의 높낮이가 보인다고 한다. 문제는 아들은 악보를 전혀 못 읽는다는 것이다. 천재적이라는 음악의 소질은 처가의 유전적 재능을 탄 것이 분명했지만, 결론적으로는 악보를 읽을 수 없어서 음대 진학을 포기했다. 나로서는 이해가 좀 안 되는 부분이다. 분명 그 당시 둘째에게 다른 사정이 있었다고 여겨지지만, 악보 공부야 조금 노력하면 금방 될 텐데, 겨우 악보를 못 봐서 자기 꿈을 포기한다는 것이 어딘가 앞뒤가 안 맞아 보였다.
이쯤 되면, 초자연적인 능력과 꾸준한 노력 중, 어떤 것이 우리 삶에 더 중요할까 생각하게 된다. 나는 진부하지만 천재성보다는 꾸준함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천재적인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며 거기에 만족하기보다는, 타인에게 인정받고 소통하기 위한 노력이 더 중요하다. 타인과의 소통이 부재된 천재성은 결코 열매를 맺지 못한다. 자신을 믿고 꾸준히 지속하는 것이야말로, 범부가 초능력을 가질 유일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