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사소한 것이 남는다

by 구일영

아쉽게도 어린 시절 아버지가 놀아 주셨던 기억이 좀처럼 없다. 아버지는 주로 안 계셨다. 어쩌다 일찍 들어오시는 날에도 아버지는 주무시기 일쑤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버지는 그 당시 교대 근무를 하고 계셨기에, 내가 놀고 있던 오후 시간이 아버지에게는 수면 시간이었던 셈이다. 1979년으로 기억된다. 어느 가을 오후 선선한 바람이 불던 날이었는데, 추수가 끝난 들에서 아이들이 연을 날리고 있었다. 아이들이 학교 앞 문방구에서 산 조잡한 비닐 가오리연들이 추수 끝난 들판을 가득 메우고 있었는데, 나는 그 연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다들 형들이 연을 만들어 줬거나, 같이 연을 날리고 있었다. 그때 왜 그렇게 형 있는 애들이 부러웠던지! 나는 풀이 죽어 집으로 들어와 어머니께 연을 만들어 달라고 졸라 댔던 것 같다. 그런데 주무시고 계시던 아버지가 그날 나의 볼멘 목소리를 들으셨는지 벌떡 일어나셨다.


아버지는 한지에 풀 먹인 살대를 붙이고 근사한 방패연을 만들어 주셨다. 방패연은 크기도 크기지만, 가오리연이 아니라 더 특별했다. 직접 만들어 주신 방패연은 평범한 가오리연에 비해 한눈에 봐도 요즘 말로 포스가 남달랐다. 연을 띄우기도 전에 이미 자신감이 한껏 고양된 나는 그 길로 아버지의 손을 잡고 들판으로 나갔다. 과연, 나의 방패연은 낮게 날고 있는 다른 연들과 달리 순식간에 가장 높은 곳을 차지했다. 아버지는 어렸을 적에 동네 친구들과 연싸움도 많이 했다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그때의 뿌듯한 마음을 잊을 수 없다. 아버지가 매일매일 이렇게 나랑 놀아 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와 처음으로 명동에 나가서 영화를 본 일도 생각난다. 어느 날 고등학교 시절 방구석을 뒹굴고 있던 내가 딱해 보였는지, 어머니는 명동에 같이 나가자고 하셨다. 사춘기를 지나며 어머니와 명동에 나가는 것이 처음이라 무척 신났던 기억이다. 명동에 나간 우리는 일단 칼국숫집을 찾았다. 어머니가 꽤 익숙하게 식당을 찾아내시는 모습에 다소 의아했다. 처녀 때 명동을 꽤 활보했던 어머니는 단골집에 가셨던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당시 어려운 살림의 무게에 지쳐 있던 어머니가 답답한 마음을 해소할 방편으로 외출하셨던 것이다. 어머니는 나와의 그 외출을 기억하시는지 몰라도, 나는 어머니 덕에 시내에 나갔고, 맛있는 만둣국을 먹었고, 충무로에 가서 영화도 봤다. 그 눈 오는 겨울 어머니와 같이 한 명동 외출도 내 기억에 남는 삶의 장면이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늘 노동에 피곤하셨고, 하루 노는 날이 되면 나름 우리들과 시간을 같이 보내려고 하셨지만, 주중 내내 나는 동생과 둘이 있어야 했다. 내가 중학생이고 동생이 초등학교 고학년이었던 무렵에는 한창 크느라 늘 배고팠던 기억이다. 그 때문에 나는 조기에 밥 짓는 방법과 간단한 요리를 만드는 것을 자연히 익히게 되었다. 학교를 다녀와 배가 고팠던 나는 동생에게 계란, 대파, 밥, 간장만 있으면 뚝딱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간장 계란 볶음밥을 만들어 주곤 했다. (지금도 요리는 잘한다!) 어느 해인가 군대에서 휴가 나온 동생이 그 계란 볶음밥을 해달라고 해서 깜짝 놀랐던 적도 있다. 동생에게는 내가 만들어 줬던 그 간장 계란 볶음밥이 특별했던 것이다.


우리는 가장 소중한 존재들인 가족에 대해서 양가적(兩價的) 마음을 품게 된다. 생각하면 늘 가슴 아픈 대상들이기도 하지만, 아웅다웅하면서 때로는 가장 아픈 말들을 던져 서로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대상이 되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같은 기억을 두고도 서로 다르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적에 철 모르고 대들었던 사실을 나는 부모님께 죄송하다고만 생각하는데, 같은 일을 두고서도 부모님은 그때 해주지 못해서 미안했다고 기억하시는 장면들이 꽤 있다. 내가 서운했던 장면들을 상대방은 다른 감정으로 기억하고 있을 확률이 크다. 그러나, 고단하고 힘든 일상에서도 부모님은 우리 형제에게 시간을 할애하려고 노력하셨음은 분명하다. 내가 기억하는 부모님과의 인상적인 장면들은 그저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의 극히 일부분일 확률이 크다.


삶의 사소한 편린(片鱗)들이 모여 거대한 가족 서사가 되고, 이런 공유된 기억들은 끈끈한 가족애의 형태로 남게 된다. 이 세상에 내가 가장 사랑해야 할 가족들에게 나는 어떤 존재였던가? 사람 사이에 큰 갈등의 골짜기를 만드는 것은 커다란 사건 때문이 아니라 기억도 되지 않을 사소한 일들 때문이다. 가족은 늘 곁에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오늘은 조금 서운해도 다음에 하자고 미루게 되기 쉬운 대상이 된다. 나는 김한길의 『눈 뜨면 없어라』라는 에세이를 좋아한다. 이 책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두 주인공이 헤어지게 되는 장면이다. 이별에 즈음해 주인공이 한탄하면서, '우리가 헤어지게 된 원인은 하루하루 너무 열심히 살았기 때문이다'라고 독백한다. 열심히 살아가는 목적 때문에, 차순위로 미루고 미뤘던 그 일련의 작은 일들 때문에 헤어지게 됐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아서 그런지, 나는 우리 아이들이 사춘기였던 시절에도 되도록 많이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했다. 남들처럼 캠핑도 가고, 특이하게도 K리그 축구장에도 일부러 찾아가곤 했다. 이유는 단 하나, 사춘기에 들어선 아이들과 더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조급했다. 내 식대로 잘되지 않으면 화부터 냈던 것 같다. 아이들은 곧 나와 외출하기를 주저했고, 급기야 내가 주도했던 캠핑도 축구장 직관도 오랜 시절 같이 하지는 못했다. 지금을 붙잡으려는 나의 욕심이 초래한 결과다. 내가 아이들의 마음을 더 헤아리려고 노력했어야 했다고 자책한다.


군대를 제대한 큰아들이 갑자기 몇 년 동안 안 가던 K리그 직관을 가자고 갑작스럽게 내게 제안한 것은 놀라웠다. 고맙기도 했고, 또 아이의 기억에는 나와의 K리그 직관이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지 궁금했다. 그러나 왜 다시 나와 동행하려는지 속내를 물어보지는 않았다. 구차한 변명이나 이유를 속속들이 알 필요는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순간을 가족들과 의미 있게 보내는 것이다. 지금도 사라져 가는 이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니까.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해야 한다. 수년 후 어떤 기억의 부스러기로 남아있을지 모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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