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은 우리를 단단하게 만든다. 어릴 적부터 크고 작은 일들이 많았지만, 돌이켜 보니 군대를 다녀온 20대 중반부터 조금 더 삶이 힘들어졌다. 앞서 이야기한 캐나다에 단기 연수 때 일이다. 나름 성적이 좋아서 내친김에 아예 캐나다에서 대학을 마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랑 같지만 수업을 듣고 소통할 수 있는 영어 실력도 괜찮았고, 또 에세이 수업을 하다가 알게 된 독물학(Toxicology)에 대한 관심이 원인이었다. 당시 국내에서는 독물학이란 과목은 의대나, 약대에서만 가르치던 과목인데, 내가 있던 대학은 독물학과가 학부 전공으로 따로 있어서 차원이 다른 공부가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조금 노력하면 인터내셔널 학생으로서 잘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의 불씨를 조금씩 살려가던 그때, 어머니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왔다.
그날 어머니의 전화 내용은 ‘아버지가 편찮으시니, 예정 보다 일찍 들어오면 안 되겠냐’로 요약됐다. 마침 동생마저 군대를 가야 했기에, 집안의 남자 셋이 전부 부재일 경우가 될까 봐 염려하셨던 것이다. 남편은 병으로, 첫째 아들은 캐나다에, 둘째는 군대로. 참 답답하셨을 것이다. 아버지의 병환도 병환이지만 그로 인해 일을 못하시니, 내가 빨리 돌아가야 하는 상황은 당연했다. 잠시 품었던 독물학 공부에 대한 열망도 그대로 미련으로 덮어둬야 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 여기며,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다.
아버지는 반갑게 나를 맞아 주셨지만, 몇 달 동안 쉬셔야 하셨다. 나는 바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돈을 벌었다. 갑작스러운 귀국에도 모자라 또 큰 사건이 벌어졌으니, 마침 내가 캐나다에 있던 동안 옮기신 전셋집이 화근이었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보일러가 고장 나, 2층 주인집에 수리를 해 달라고 요청하려는데, 주인집이 몇 주째 연락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급기야 주인집 문 앞에 우편물이 수북이 쌓여갈 때쯤 무엇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며칠 더 지나니 주인집에 집달리가 들이닥쳤다. 망한 것이다.
매년 이사를 해 나름 전세 계약에 대해 경험이 많으셨던 부모님이 설상가상 이 주인과는 전세권 설정은커녕, 확정일자도 받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됐다. 부모님은 그렇게 수십 년간 이사를 다녔어도 한 번도 잘못된 적은 없어서, 그냥 믿고 계약을 했다는 것인데, 꼭 안 좋은 일은 가장 최악의 순간에 우리를 찾아오는 듯싶었다. 조금 일찍 유학에서 돌아온 것도 모자라, 집은 이제 거리로 나앉아야 할 판이었다. 나는 두 어깨에 무거운 부담을 느꼈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모두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나름의 이유로 각각 불행하다던, 톨스토이(Leo Tolstoy)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대목이 생각났다. 파란(波瀾)이었다.
생각해 보면 내 삶은 파란과 닮았다. 작은 물결과 큰 물결이 계속되며 나를 흔들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처음 시작한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시작으로, 공장에서 박스를 접기도 하고, 중화요리점과 칼국숫집에서 배달을 하기도 했다.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하기도 했다. 기억나는 현장은 부천 중동과 안양 박달동 아파트 단지와 경희궁 뒤편 서울 시립미술관이다. 군대를 제대하고 나서는 번역 아르바이트도 했다. 영등포 곽영일 어학원에서는 텔레마케팅도 했었다. 여의도 증권가 객장에 속칭 지라시라는 유인물을 나누는 아르바이트는 스릴 있었다. 물론 흔한 과외도 했고, 학원 아르바이트도 했다. 한 가지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다른 아르바이트로 옮겼다. 매일 같이 돈을 벌었다. 고난은 파란처럼 끝이 없이 밀려왔다.
그러나 절망에 빠져 있을 여유가 없었다. 당장 돈이 필요했고, 일해야 했다. 다행히 거리에 나앉아야 할 위기에 있었던 우리 집은 그런 파국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곧 회복하셨고, 내가 아르바이트하는 것까지 더해 어느 정도 견뎌낼 수 있었다. 이상한 것은 여기가 바닥이라고 생각하니, 더 미루거나 거리낄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주변에 누구도 나보다 딱해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그렇게 우리 가족은 서서히 끝없는 고난을 견디고 단단해져 간 것 같다. 나는 우여곡절 끝에 겨우 대학을 졸업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앞의 다양한 아르바이트 경험이 내가 취업하는 데 도움이 무척 됐다는 사실이다. 흔한 영어 점수 등 스펙보다는, 현장에서 뛴 경험이 높이 평가받았던 듯했다. 특히 철판 깔고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를 돌려 교재를 팔아야 했던 텔레마케팅 경험이 높게 평가받았다. 007 영화를 찍듯이 증권가에 유인물을 돌리고 잽싸게 빠져나가는 아르바이트도 면접관들의 기억에 남았던 듯하다. 기억도 나지 않을 작은 물결에 바위가 무너져 내리듯, 일상의 고난은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나를 무척 단단하게 만들었던 같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어느덧, 나는 청바지를 버리고 어머니의 바람대로 양복을 입게 되었으며, 자전거를 버리고 자가용을 몰고 출근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꿈이 이뤄졌고, 그건 나의 꿈이 이뤄진 것을 의미했다. 파란처럼 몰려들던 그 고난의 물결이 잠잠해지자, 그때의 기억은 흔들리지 않는 인생의 교훈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