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죽음 앞에 당당하기 위한 조건

by 구일영

시골이라고 해야 더 어울리는 서울 변두리에 살았던 덕분에 좀처럼 도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토끼를 키웠던 일이다. 어떻게 토끼가 우리 곁에 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집에서 키우던 토끼가 아닌, 야산에서 내려온 놈을 아버지가 잡아오신 것이 분명했다. 토끼집은 가림막이 있는 TV 상자를 활용했다. 미닫이문이 있는 TV 상자가 그렇게 멋진 토끼집이 될 줄은 몰랐다. 토끼를 키우게 된 이후로 동생과 나는 학교가 파하면, 돌아오는 길에는 항상 토끼에게 줄 풀을 뜯어 귀가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집에 들어서면 어떻게 알았는지 녀석은 고개를 밖으로 뺀 채 우리가 줄 풀을 기다렸다. 나 아닌 다른 생명체를 먹이는 일은 큰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오면 습관적으로 고개를 길게 빼던 녀석의 버릇이 큰 사고로 이어질 줄은 몰랐다.


당시 우리 집이 세 들어 살던 곳은 마을 뒷산으로 올라가는 길목 제일 마지막 집이었다. 뒷산으로 가려면 이 집을 지나가야 했는데, 평소에 개 줄도 없이 큰 개와 산책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느 날인지 그날도 토끼풀을 뜯어 집으로 향했는데, 우리 집 앞에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는 상황이 벌어져 있었다. 순간적으로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어 대문으로 뛰어갔지만, 토끼는 싸늘하게 죽어 있었다. 사정은 이랬다. 하필 그 줄 없이 다니던 큰 개가 우리 집 열려 있는 대문으로 돌격했던 것이다. 토끼는 누군가의 기척에 또 습관적으로 고개를 밖으로 뺐는데, 그만 그 개가 토끼의 목을 물어버려 죽여 버렸던 것이다. 나는 갑자기 울음이 왈칵 쏟아졌다. 어느덧 토끼는 사후강직이 왔는지 뻣뻣하게 굳어 있었고, 눈도 감지 못한 채 동공엔 흙가루가 잔뜩 묻어 있었다. 이내 토끼의 안구는 흐릿해졌다. 처음으로 목격한 죽음이었다. 소멸이란, 그리고 죽음이란 준비할 겨를도 없이 그렇게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죽음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처음 느꼈다.


인간은 당연히 소멸을 막을 수 없다.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죽음을 그대로 맞이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우리는 죽음 앞에서 모두 평등하다. 죽음 앞에선, 살겠다고 시지프스처럼 아등바등하는 우리 인간의 모든 활동들이 무의미하다. 토끼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목격하고 한참 뒤, 생명의 위대함을 역설했던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을 보게 됐다. 언뜻 보면 우리 인간이 고작 유전자가 생명을 보전하기 위한 수용체에 불과한 존재로 전락한 것이 아닌가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의 핵심은 자연에서 세대를 거치며 소멸하지 않고 오랜 시간을 유지하는 것이 오직 생명뿐이며, 특히 인간은 소멸로 향하는 자연의 폭정에서 세대를 거치며 문화를 전수해 영원을 꿈꿀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이성이야말로, 냉혹한 우주의 법칙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라는 가르침. 멋졌다.


생각해 보면 생명은 세대를 통해 자신과 동일한 개체를 유전자라는 도구를 이용해 전수시키는 기적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수만 년 전부터 자신과 동일한 후계자를 지속적으로 만들고 진화를 통해 환경에 적응했다. 인간은 과학을 발전시켜 그 세대 간의 수명도 연장하고 있지 않는가? 인간이 만든 찬란한 문화도 정보를 통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긍정적인 희망이 느껴지는 지점이었다. 인간이라는 종을 통해 생명에 대해 거시적으로 확장된 렌즈로 보면 이런 생각이 가능하다. 그러나 생명 한 개체로 대상을 한정적으로 좁혀보면 분명히 죽음이라는 이름의 막을 수 없는 소멸을 겪어야 할 운명에 놓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영국의 위대한 에세이스트 윌리엄 해즐릿(William Hazlitt)은 죽음에 대해 처연히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에세이 『죽음에 대하여』에서는 죽음이란 원래의 깊은 정적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그런 깊은 정적의 상태에 빠지는 것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고 말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자기가 생에서 소유했던 것을 영원히 가져가고 싶은 욕심에서 출발했다는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또 하나의 원인에는 열심히 살지 못했다는 깊은 회한도 있다. 해즐릿은 자신이 기억에 남는 멋진 에세이를 하나 썼다면, 죽음을 기꺼이 맞을 것이라 담대하게 말했다. 얼마나 대단한가!


죽음 앞에 허둥지둥하지 않고 담담히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나의 가족에게도 있다. 앞서 소개한 인천 송도 해수욕장 사건의 그 작은이모는 암으로 돌아가셨다. 암세포가 퍼져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들은 이모는 호스피스 병동 생활을 거부하셨다. 그보다는 삶의 마지막 몇 개월을 집에서 지나며 조용히 마무리하고 싶다는 이모의 바람을 가족들은 존중해 줬다. 암 치료에 들어가는 엄청난 비용도 비용이지만, 자신의 존재로 인해 자식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나는 죽음을 맞이하면서 저렇게 담대한 마음을 품을 수 있을지 되돌아보았다.


좀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맞이한 가족도 있었다. 작은할아버지다. 마찬가지로 큰 병에 걸리셨던 작은할아버지는 가족들에게 부담을 줄 수 없다는 생각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고 한다. 나는 이 사실을 수십 년이 지나서 알게 되었는데, 엄청난 충격에 빠졌었다. 할아버지 형제 분들 중에서는 가장 오래 사셨기도 했지만, 바르게 사셨고 가족들에게 잘해 주셨던 분이라 충격은 더 했다. 물론,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마감하는 일에 대해 윤리적으로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마다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닌, 적극적으로 죽음의 시간을 지정하는 행위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나는 스스로 생을 마감시키는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죽음을 당당히 맞이하기 위해서는 오늘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위대한 자산을 후대에게 물려줘야 당당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보다는 자신을 기준으로 후회 없이 살았다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열심히 살아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열심히'의 판단은 주관적이겠지만, 가령 열심히 사랑하는 것도 한 가지다. 자신의 주변에 사람들을 사랑했는지, 그렇지 않았더라도 죽기 전에 그들을 용서하고 화해했는지 하는 것들은 위대한 작품을 창조하는 만큼의 숭고하고 아름다운 일이 아닌가 싶다. 소멸을 담담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오늘 내가 주어진 시간을 열심히 살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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