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나의 아비투스

by 구일영

초등학교 때 가훈을 써가야 했던 숙제가 기억난다. TV 드라마를 보면 가훈을 건 액자가 있고 나름의 멋진 말들이 쓰여 있곤 했던 게 부러웠었다. 당연히 우리 집엔 그런 가훈도 액자도 있을 리가 없었지만. 그날 퇴근하시고 돌아오신 아버지에게 대뜸 우리 집 가훈이 뭐냐고 여쭤보니, 아버지는 글쎄 하시곤 조금 생각하셨다. 아버지가 써 주신 네 글자는 '정직, 근면'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군사 독재 잔존 문화가 잔뜩 느껴지는 가훈이었는데, 난 다음날 거리낌 없이 우리 집 가훈을 선생님께 제출했다. 왜 집의 가훈을 적어가야 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른다. 그러나, 억지로라도 냈던 가훈은 내 뇌리에 남았다. 그 후 왠지 모르게 어떤 일이 있어도 정직해야 하고, 또 반드시 부지런해야 한다는 자세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봤던 기사 댓글에서 '개룡남'이란 단어를 봤다. 기사의 내용은 경제적 양극화에 관한 내용이었고, 그에 대한 댓글 중 ‘요즘은 개룡남이 흔하지 않다, 개룡남과 결혼한 여자는 피곤하다’는 내용이 있었다. 나는 '개룡남'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그것이 개천에서 용 된 남자를 뜻한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가난한 가정환경을 뚫고 소위 출세한 남자인 개룡남, 그것이 언제부터 어려운 일이 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내 경우를 빗대어 보면, 나도 완벽하진 않지만 나름대로 반(半) 개룡남쯤 되지는 않는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에 빠졌다. 완벽한 개룡남이 되지 못하고 반 개룡남이라 느꼈던 원인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건 '결'이었다.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유난히 느긋하고 유머가 넘치는 직장 후배를 만난 적이 있다. M이라는 친구는 나보다 7살 정도 아래였는데, 항상 미소를 잃지 않았고, 여유 있는 자세를 보였다. 오히려, 조금은 긴장해야 할 상황에서도 너무 느긋해서 당황하게 만드는 친구였다. M은 기부와 봉사에도 관심이 많았다. 틈만 나면 교회에서 봉사 활동한다며 휴가를 내기도 하고, 연말 공제할 때면 기부금 다발을 가져오곤 했다. 곤경에 처한 동료를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도 했다. 한마디로 ‘나이스 가이’였다. 그 친구의 집이 상당히 부유하다는 것은 나중에 안 사실이다.


반면, 그 친구와 동기로 입사한 W는 속칭 ‘흙수저’였다. 야간 대학을 나온 W는 학창 시절 내내 피부과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미소를 잃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다. 출근 시간에 간당간당하게 오거나 조금 늦는 습관이 있어서, 내게 야단을 맞기도 했었다. 늦은 이유를 나중에 물어보면 자신은 일찍 오려했는데, 나오다 보니 동네 택배 차량이 골목을 막고 있어서 그랬다든가 하는 핑계가 있었다. 뭔가를 적극적으로 이뤄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도 읽혔다. 잘하고 싶지만 뜻대로 안 되는 상황, 어쩐지 W는 나를 닮은 구석이 많았다. 이상하게도 나는 이성적으로는 M의 삶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지만, 심리적으로는 오히려 W를 동조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도리스 메르틴(Doris Martin)의 『아비투스』는 몇 해전 굉장히 유명했던 책이다. 아비투스(Habitus)란 주어진 경제적 사회적 환경 속에 장기적으로 노출된 사람이 가지게 되는 삶에 대한 태도를 지칭한다. 바꿔 말하면 구태여 말로 표현하지 않더라 은은하게 풍기는 그 사람의 '결'이라 말할 수 있다. 책에서는 부자와 중산층 그리고 하류층에 생활 태도를 심리자산, 문화자산 등의 7 가지 자산으로 풀어 설명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상류층의 아비투스보다는 중산층이나 하류층의 아비투스를 갖고 있음을 알게 됐다. 특히 정직과 근면은 하류층의 아비투스였다는 사실이 무척 놀라웠으면서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우리 아버지는 가훈으로 '정직, 근면'을 이야기하셨었는데......


당당하면서도 고압적이지 않고, 여유와 유머가 넘치며, 타인을 돕는 데 적극적이고, 봉사와 기부 활동에도 인색함이 없는 사람. 최상층의 아비투스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한다. 이와 달리 현실 투쟁적이며 적극적으로 쟁취하려고 노력하고, 논쟁적이면서 약간은 비협조적이며 자신을 돋보이려 노력하는 것이 대표적인 중산층의 아비투스다. 마지막으로, 주어진 사실에 순응하고 정직과 근면을 최상의 가치로 생각하는 것이 흔한 하류층의 아비투스라고 한다. 내가 가진 아비투스는 중산층과 하류층을 적당히 섞어 놓은 상태라 놀랐다.


우리가 살다가 보면 속칭 '결'이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된다. 자신보다 더 나은 '결'을 갖고 있는 사람에 험담하거나 질투하곤 한다. 자신보다 낮은 '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무시하거나 상대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꼭 급여명세서나 자산 명세를 공개하지 않아도, 드러나는 아비투스. 아비투스를 통해 그 사람의 사회적 계층이 어디쯤 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니, 놀라운 동시에 무섭기도 했다. 돌이켜보니 내가 생각 없이 저지른 행동 중에는 나 스스로 하층민임을 자인하는 것들이 있었음에 수치스러웠다.


그런데 우리 모두 상층민의 아비투스를 가져야만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모두가 최상층의 아비투스를 갖는다고 상상하면 오히려 이상해 보인다. 누군가 나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빼앗으려 해도 허허허 웃고만 있어야 하는가? 자기 지갑에 돈이 한 푼도 없어도 타인을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서야 하는가 하고 반문해 봤다. 또한, 어쩔 수 없는 '결'이 우리의 보이지 않는 계급을 스스로 규정하고, 그 계급에 순응해야 한다고 종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들로 머리가 아파진다.


나는 남에게 부탁이나 싫은 소리를 하기보다는 나 스스로 해결하는 자세를 가지고 살았다. 그렇다고 구차하게 변명하지도 않는다. 잘못된 일에 대해서 감추기보다는 반대로 드러내고 사죄를 하는 편이다. 선택적 사교형이라 친해질 때까지는 제대로 이야기도 못 건네는 내향인이다. 시민 연대 기관이나 실의에 빠진 이웃을 위해 정기 기부를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봉사하고 있지도 않다. 약속 시간에는 5분 전까지 꼭 도착하려고 애쓰고, 주어진 일은 정해진 기한이 있더라도 될 수 있으면 더 빨리 처리하려고 애쓴다. 강자가 강제한 불의를 참지 못하고, 속칭 똘기(?)로 대들기도 한다. 곤경에 처한 약자에 대해서는 도움을 주려고 애쓴다. 이렇게 쓰고 나니, 내 안에는 소위 최상층, 중산층, 하류층의 아비투스가 혼재하고 있음을 느낀다. 사람의 자세는 계급으로 선 긋듯 확연하게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계가 흐릿한 무지개와 같은 스펙트럼에 가까워 보인다.


아비투스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옭아매는 것보다 자연스러운 나만의 아비투스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마음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어도, 겉으로는 여유 있는 척 가면을 쓰고 있어야 이성적이고 더 있어 보인다면, 나는 차라리 그런 가면을 벗어던지고 말 것이다. 오히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아비투스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이를 더 발전시켜야 제대로 된 나만의 '결'이 탄생되지 않나 싶다. 내가 품고 있는 삶의 태도는 수십 년간 내가 경험한 수많은 인과 과정의 결과로 형성됐다. 나의 결, 아비투스는 오롯이 나를 규정하고 인증하는 독창적인 그 무엇이 아닐까? 그 옛날 아버지가 건네주신 우리 집 가훈 '정직, 근면'이 더 빛나고 가치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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