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아름다운 소음

by 구일영

누군가의 말을 소음으로 느낀 적 있는가? 내게 무의미하거나, 쓸데없는 잡소리라 생각되기 때문에 애써 외면하고, 등 돌렸던 그 소리들이 실제로는 살려 달라고 목청을 올려 부탁했던 거라면 어떨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게도 그런 소리들이 있었다. 사춘기를 맞이했던 아들들의 목소리들이 그랬다. 그때는 왜 그 소리들을 몰랐는지.


우리 집 첫 사춘기 타자는 큰애였다. 원래는 큰애는 마음이 여리고 상처를 쉽게 받는 성격이라 목소리가 크지는 않았다. 조금 이기적이기도 하고, 제 것을 동생과 나누기도 싫어해서 조금씩 트러블이 있곤 했는데, 사춘기가 되자 가냘픈 목소리는 어느새 걸걸하게 변해 있었다. 일명 딱 ‘돼지 멱따는 소리’ 그거였는데, 문제는 당시 큰애가 헤비메탈 음악에 심취해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 집은 밥 먹는 시간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언제부터인지 밥상머리에서 큰애는 곧잘 노래를 흥얼거리던가, 웃기지도 않은 개그를 쉴 새 없이 시전 했다. 걸걸 거리는 것과 노랫가락이 합쳐져, 정말이지 투닥투닥 소음 그 자체였다. 오죽하면, 아내가 그만 좀 떠들라고 큰애를 말렸을 정도다. 어디서 그런 에너지가 나오는지 참 대단했다.


우린 당시 복층 구조의 집에 살았다. 아파트가 좁아 좀 저렴한 대신 아이들의 독립적인 공간을 만들어주기 위한 방편으로 구입한 집이었다. 아이들의 공간 확보 면에서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문제는 너무 독립적이었다. 문득 그 옛날 나의 아지트가 되어줬던 판잣집 우리 방이 떠올랐는데, 그것과 거의 유사한 정도의 독립 정도였다. 아무튼 두 아들은 독립된 공간에서 헤비메탈을 듣고 또 들었다. 밤에는 위층이 윙윙거렸다.


일본 출장을 가서 한창 일할 때, 아내로부터 카톡이 왔다. 일본은 좀 데이터 송수신이 느린데, 그래서인지 카톡 메시지가 느릿하게 열렸다. 아내가 보냈던 동영상은 한참 뒤에 열렸는데, 큰애가 갔다던 수련회 가서 보내온 장기자랑 동영상이었다. 동영상을 열자마자 난 헉하고 탄식이 나왔다. 그만저만한 중학생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연호한 주인공은 다름 아닌 큰애였다. 긴장한 듯 다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큰애는 한참의 응원을 뒤로하고 드디어 장기 자랑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익숙한 리듬의 드럼 소리와 일렉트릭 기타의 전주가 째깍째깍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큰애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노래는 녀석이 집에서도 늘 흥얼거리던 아이언 메이든(Iron Maiden)의 노래였다. 고막이 떨어져 나가는 듯했다. 휴대폰 음량을 성급히 중간으로 내렸다. 마치 어떤 괴물이 철창에 갇혀 여기저기 부딪히며 내지르는 비명 같았다. 화면 속의 큰애는 귀청이 떨어져라 고함을 치면서 발로는 박자도 맞추며 제대로 흥이 오른 모습이었다. 신내림이라도 받은 듯 광기 어린 큰애의 노래가 끝나자, 장기자랑을 하고 있는 강당은 친구들의 야유와 박수가 교차했다.


그때 나는 큰애의 가장 행복한 얼굴을 화면을 통해서 봤다. 집에서 볼 수 없었던 굉장한 에너지의 발산이었다. 어떻게 저런 에너지를 숨기고 살았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가수가 되겠다고 하면 어쩌지 하고 눈앞이 어질어질 해졌다. (사실, 절대로 가수는 되지 못하는 노랫소리다. 녀석이 좋아하던 헤비메탈 음악은 가장 시끄러운 쓰래쉬메탈(Thrash Metal)이었으니까.) 그런 큰애의 모습을 보면서, 더불어 나도 행복했다. 무엇인가를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젊음의 증거이자, 잘 살아있다는 반증이니까.


같은 사춘기라도 저마다 증상이 다르듯, 작은애의 사춘기는 큰애와 달리 조용히 왔다. 작은애는 절대 음감을 가지고 있었다. 짐짓 나는 속으로 천재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천재라고 생각한다, 게으른 천재.) 작은애도 음악에 심취했다. 단, 제 형처럼 시끄럽게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형의 반주를 맞춰주는 형태였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해서 가르쳐 줬더니, 몇 주도 안 돼서 학원 진도를 다 뗐다. 피아노를 배우고, 드럼을 배웠다. 소질 있다는 소리도 들었다. 그러다 가수인 제 외할아버지가 준 기타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작은애는 통기타를 치다가, 예상된 수순대로 일렉트릭 기타에 빠져들었다. 녀석은 한 번 들은 음악을 그대로 복제하는 신기한 능력을 지녔다. 복잡하고 긴 음악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지금도 미스터리지만, 한 번 죽 듣고, 이내 일렉트릭 기타로 들었던 음악을 정확히 복제해 냈다. 난 작은애가 은근 음악으로 대성할 줄 알았다.


때마침, 지방에서 내 친구 가족들이 놀러 왔다. 대학 동기이기도 한 친구 부부가 올라올 때면, 근처에 다른 친구들도 합류해 대 여섯 가족이 우리 집에서 머물곤 했었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는데, 나는 술을 먹다가 흥에 겨워, 작은애의 재능을 자랑하고 싶었다. 한 번 들으면, 절대 잊어 먹지 않고 그대로 복제한다고 하자, 친구들이 작은애의 연주를 듣고 싶어 작은애에게 연주해 보라고 했다. 그런데, 거기서 사달이 났다. 작은애의 가장 큰 결함은 가족 아닌 다른 사람 앞에서 연주를 못한다는 것이었다. 일종의 패닉 상태가 온 것인데, 자기 말로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어서 연주를 못하겠다 했다. 결국, 그날 작은애는 연주하지 못했다. 나는 작은애가 남들 앞에서 왜 저리 작아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녀석의 음악은 취미로 끝나고 말았다.


기시미 이치로(岸見一郎)의 책 『미움받을 용기』는 프로이트의 원인론을 반박하는 아들러(Alfred Adler)의 심리학을 잘 전파해 유명해진 책이다. 아들러는 프로이트의 심리학의 단점은 과거의 욕구불만 결과에만 얽혀 연연하게 됨을 지적하고, 역으로 미래지향적 삶의 목적이 더 중요하다 가르쳤다. 그는 인정욕구에 대해서도 미온적이며, 오히려 타인의 비난이나 지적에도 굴하지 않을 용기를 강조했다. 큰애와 작은애는 비난 굴하지 않을 용기면에서 극단으로 달랐던 것 같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작은애는 마음의 소리로 내게 대화를 하려고 했던 거였다. 요란하게 제가 하고 싶은 것을 당당히 요구하는 큰애와 달리, 작은애는 자신만의 목소리로 부모인 우리들에게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들어달라고 말이다.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남들 앞에서 연주하지 못하는 아이로 낙인을 찍어 버린 건 아닌지.


다른 사람의 듣기 싫은 소리를 우리는 소음이라 단정 짓고 차단한다. 자세히 이해하려 하지 않고 무시하기 일쑤다. 쉽게 단정하지 말아야 했다. 그때 아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크고 있다고 자랑하고 싶었다는 걸, 나는 긴 세월이 지난 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때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단순히 사춘기에 한때 지나가는 열병이라고 치부했다. 다시 그때가 오면, 두 아이의 마음의 목소리에 더 자세히 귀 기울여 줄 텐데. 그 돼지 멱따는 소음을 기쁘게 맞이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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