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정리해야 할 시간이다. 내 삶은 끝없는 선택의 결과다. 부정할 수도 부정해서도 안 된다. 때론 절망의 나락에 빠졌고, 오해와 편견으로 누군가를 증오했던 시간들도, 내 삶에는 넉넉한 비료가 되어 앞으로 조우할 또 다른 내가 될 자양분이 되기 때문이다. 빙글빙글 돌아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쩌랴, 그것이 인생인 것을.
어린 시절, 나의 자유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작된 삶에 대해 억울해하고 원망하던 때도 있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것이 나를 주눅 들 게도 했다. 기대하지 않는 습관과 앞으로 나서길 주저하는 내향적인 나의 성향은 그때 완성되었다. 삶이 주는 아픔이 나의 어깨를 누를수록 나는 나만의 공상에 빠져들었다. 나만의 창으로 세상을 보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 반대급부로 세상과 나를 연결시켜 주는 음악에 심취하기도 했다. 나만의 산동네 골방에 숨어서 두려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봤다. 몹시 두려웠다.
나만의 아지트에서 부모님의 손을 부여잡고, 첫 발을 떼던 순간의 깊은 고요처럼, 나는 음습한 그곳에서 조용히 웅크리고 있었다. 일종의 정서적 빈곤 상태에 놓여 무력감에 빠졌다. 내 마음이 공허했기에 누구도 사랑할 수 없었다. 그저, 순응하고 포기하는 상태가 마음 편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으며 상상 속의 죽음을 바라봤다. 인생에서 가장 푸른 시절을 일부러 잿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이제 보니 꿈도 많았던 시절이었다. 다만 그때는 내가 그걸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다.
사춘기를 지나며 비로소 사회의 불평등과 부조리에 눈을 뜨게 되었다. 우리 부모님과 같이 고생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작은 희망을 품고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세상은 내 작은 희망을 가만두지 않았다. 대학에 들어가고 군대를 제대하며 파란을 맞았다. 크고 작은 집안 문제가 끊이질 않는 사이에, 쉼 없이 아르바이트를 했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나의 세상이 아니었음에 절망했다. 깊은 밤 공대 난간에 올라, 한강변을 달리는 자동차를 보며 나는 언제쯤 저 대열에 들어설 수 있을까? 하고 경외의 눈으로 바라봤다. 그들의 평범한 일상도 내게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과 다른 세상이 있을 것이란 희망과, 치열한 현실을 떠나고자 하는 욕망은 나 자신에 대한 욕심으로 이어졌다. 무리하게 유학을 떠났고, 그렇게 해서 본 세상은 나에게 지금껏 품고 있던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말해 줬다. 타인을 위해 사는 삶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아내를 만났다. 아내와의 만남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했다. 나를 사랑하지 못하면, 타인도 사랑할 수 없다는 진리를 터득했다. 가난 때문에 그렇게 원망했던 부모님이 새롭게 보였다. 나의 말과 행동에는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 이미 부모님은 내 마음에 계셨다. 나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나만의 독특한 선물을 이미 주셨다는 걸 깨달았다. 최대의 선물이었다.
어머니가 그토록 바랐던, 양복과 넥타이 차림의 직장인이 되었다. 사회에 나가자, 내가 부모님의 아비투스를 갖고 있음을 알았다. 잘 웃을 줄 모르고 표현이 서툴지만, 정직하고 근면하게 살아야 한다는 의지만 강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한 직장에서 정년을 맞이할 줄 알았다. 때마침 세상은 다시 시련을 줬다. 안락한 회사 생활에 취해 변화에 무지했던 나는 결론적으로 경쟁에서 밀리고 말았다. 자기계발에도 소홀했다. 순진하게 열심히만 한다면 다 되는 줄로 믿었기 때문이다.
첫 직장에 사표를 던졌을 때, 두고 보자는 복수심과 원한을 품었었다. 사람을 믿지 못했고, 능력주의에 빠졌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직한 회사는 내 상상과 달랐다. 이제와는 다른 극도의 스트레스와 우울감에 빠졌다. 나 자신을 잃었고 살아가야 할 의지가 흔들렸다. 그 순간 독서는 나의 삶의 변곡점이 되어줬다. 책을 읽으면서 내 마음에 집중하자 내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자 책도 내게 보답했다. 네 마음의 진정한 소리를 들으라고, 가장 중요한 존재들을 사랑하라고 말이다. 그것은 여우별처럼 갑자기 나타난 지혜가 아니었다. 단지 항상 있었지만 내가 애써 보려 하지 않았던 가르침이었다.
그러자 회사 일에 밀려 뒷전이던 가족과의 시간이 의미 있었던 시간으로 다가왔다. 그 옛날 아버지의 방패연처럼 그 순간을 같이했던 짧았던 시간이, 아마도 우리 아이들의 뇌리에 고이고이 남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더불어 타인의 시선에 칼춤 추는 삶, 남과 비교하는 삶이 소모적이며 덧없음을 알았다. 표현은 조금 서툴더라도, 나의 말속에 사랑을 담아 전달하면, 상대방은 조금씩 마음을 열 것이라 믿게 되었다.
우리는 인생의 종점을 알지 못한다. 우리의 삶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불확실하다. 역설적이게도 인생의 예측 불가능성은 그 의미를 증폭시킨다. 우리는 누구도 살아생전에 누렸던 것들과 함께 저세상으로 가져가지 못한다. 삶의 유한성은 우리에게 삶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하루를 성실히 사는 것은 아름답고 숭고한 일이다. 이번 생의 삶을 의미 있게 살아야 다가올 이별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짐은 회복 못할 상실이 아니다. 나의 육신은 소멸되어 먼지로 사라지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 수 있을 거니까.
삶은 모래성을 쌓는 일에 견주어 볼 만하다. 끊임없이 파도가 밀려오는 해변에서 신실(信實)하게 모래성을 쌓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상상해 보자. 자신만의 피조물을 완성되어 갈수록 환희에 차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 아이의 표정을 말이다. 물론, 아이의 창조물은 파도를 만나 무너지고 말지라도, 아이는 포기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다른 모래성을 쌓아 본다. 인생은 그런 것이다. 원하는 대로 이뤄지지 않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조금씩 어제와는 다른 모습의 내가 되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모래성이 영원히 남아있느냐가 아니라, 모래성을 쌓을 때 우리 마음이다. 그때에 우리가 품었던 마음은 인생을 가치 있게 살겠다는 마음, 더불어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함께 하겠다는 소박한 마음 아닐까? 인생은 모래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