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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도 배웁니다 Mar 11. 2018

이정표를 세우기

날이 춥다. 한낮에는 분명 봄기운이 동장군을 이겨내고 진짜 봄이 왔나 싶었는데, 봄과 겨울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보다. 지금은 한기가 주변을 감싸고 있다. 한동안 다시 꺼낼 일 없어 보였던 패딩을 다시 입었다. 따뜻함을 만끽하기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다. 


하물며 날씨도 이리 오락가락한데… 


우리네 인생 날씨도 자연현상 못지않게 변덕이 심하다. 웃다가 울다가 웃다가를 반복한다. 마치 정신병자 같다. 어떨 때는 웃프기도 하다. 왜 그런 일 있지 않은가. 속으로는 울고 있지만 겉으로는 허탈감에 웃음이 절로 나오는 그런 상황. 


주로 우리 마음속에 비가 내릴 때 우리는 우리 선택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된다. 내가 과연 맞는 선택을 한 건가. SNS의 저 웃음들은 뭘까. 나는 도태되고 있는 걸까. 그때 부모님 말 들을걸.  


그래도 중요한 건 내 마음의 ‘양심’을 지켜내는 일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양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나’라는 사람을 경영하면서 마음 한켠에 찝찝함 내지 부끄러움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저 현실과 타협하면서. 남들 다 그렇게 하니까 나도. 우리 때는 다 그랬어. 그런 말들 다 소용없다. 그런 말로는 자신도 설득하기 어렵다. 자신도 설득하기 어려우니까 괜히 사회의 요구를 객관화하여 타인을 내뜻대로 움직이려고 한다. 쉽게 말해 그냥 사회가 그렇게 생겨먹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순종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사회라는 저 바다에 한 개인이 파도를 막을 수 있겠느냐 하는 것들. 그렇게 살면서 마음속 한 구석에 조금이라도 찝찝함이 남아있지 않다면 나는 당신을 인정한다. 당신은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도 된다.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아니 무조건 나에게는 떳떳한 그런 삶을 살고 싶다. 굳이 길을 우회해서 가고 싶지도 않다. 결국 ‘부’도 수단에 불과하다. 부가 정말 목적 그 자체라면 죽을 때도 그 부라는 놈을 데리고 갈 수 있어야 하지만, 결국 우리는 모두 내려놓고 가지 않는가. 그저 이 세상에 잠시 쉬러 왔다고 생각하면 사실 그리 크게 집착할 것도 없다. 오히려 많은 것이 명료해진다. 지금 내게 즐거움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 내게 ‘뿌듯함’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내 삶을 평화롭게 만드는가. 


시기, 반목, 질투는 심심함의 다른 이름이다. 혹은 불만의 다른 이름이다. 어떻게든 세상에 자신을 합리화해서 살아보지만 이놈의 삶은 합리화한다고 ‘잘’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결국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나의 ‘불행’은 ‘너’의 탓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너’가 사라지면 또 다른 ‘너’를 금방 찾아내는 사람들. 이제 알 때도 됐잖아 진짜 ‘너’는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많은 것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지금 내게 웃음을 주는 존재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으로 행복감을 느끼는가. 혹시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혹시 수단과 목적이 이미 뒤틀린 삶을 살고 있진 않은 건지 스스로를 점검해보자. 수단 그 자체를 얻는 것이 이미 목적이 되어버리진 않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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