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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도 배웁니다 Oct 26. 2019

모순을 극복하는 삶

출발점은 인간이 ‘모순’ 임을 인정하는 곳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어떻게 발생해서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른다. 모두들 죽지만, 죽은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그저 우주의 먼지로 출발해서 우주의 먼지로 돌아가는 것일까? 


그럴 것이라면 왜 하필 내가 이 ‘자아’를 인지하고 있는지 영 야속하다. 인간의 삶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얘기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그래서 너무나 슬픈 법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삶을 영위해 나가면서 인간의 신체에는 오류가 쌓여간다. 그리고 그 오류를 더 이상 신체라는 컴퓨터가 극복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죽게 된다. 우리는 왜 태어났을까? 나는 더 나은 다음 세대를 위한 유전자 ‘운반체’에 불과한 것일까? 


주변의 평판이 무너지면 우리는 못내 괴로워하지만, 한편으로는 모두들 알 것이다. 그것이 아무 부질없는 생각이라는 것을. 시점을 조금이라도 거시적으로 돌아보면, 우리는 수많은 죽음의 역사 속에 살아있는 찰나를 만끽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 또한 곧 역사가 될 것이다. 혹은 의미 없는 흙에 불과한 무언가가 될 것이다.


인생은 그토록 저열한 것이다. 왜 우리는 그토록 치열하게 살까? 왜 마치 항상 내일이 있는 것처럼 살까? 사실 ‘항상’ 내일이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은 우리 모두 알면서 말이다. 곧 삶이 끝나리라는 것을 알고, 또 그 순간이 생각보다 빨리 온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왜 우리는 오늘 하루의 삶에 이토록 집착할까? 


내가 그토록 좋아하고, 추앙해 마지않던 인물이 늙고 병들고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을 보며, 못내 숙연해진다. 삶을 항상 되돌아보게 된다. 모두가 아이큐가 500인 세상에서 나는 바보 천치일 것이고, 모두가 아이큐가 50인 세상에서 나는 시대의 천재일 것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고, 이 또한 별반 의미가 없다.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는 것도, 사회에서 풍족한 삶을 누리는 것도 그 순간만큼은 잠시 즐거울 수 있지만 그뿐이다. 톨스토이도 만년에 죽음을 그토록 두려워했다. 인류사에 남는 성취를 하더라도 죽음은 결코 피해 갈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의 삶은 그토록 짧다. 70년이라는 세월. 우리가 늘 얘기하듯이 일 년 일 년이 빠르고, 나 또한 어느새 기성세대로 편입해 있다.


우리는 어느 곳에 서 있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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