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지가쌓여간다
사내는 말이 없다.
늘 그렇듯이 그냥 다녀 갔다.
원고지와 녹차가 놓여 있었다.
시커멓고 투박한 손에 이렇게 앙증맞은 원고지를 들고 다닐 풍경을 상상하기만 해도
여자는 좀 미안해졌다.
지저분하게 흐트러졌던 책상들이 다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고,
원고지와 녹차가 놓여 있다.
글을 쓰는 일 따위에 일생을 바치는 어리석음은 버릴 테다,
늘 호기롭게 외치면서도 만지작거리게 되는 원고지며 연필이며 하는 사물들을
마주하면 가슴이 뛴다. '
사내는 여자를 알고 있다.
단 한번도 시선조차 마주한 적이 없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가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는 사실은 차마 외면하지 못한다.
사람이 사람을 응원하는 일에 대하여
가장 기본적인 위선이 아닐까, 못되게 생각해본 적이 있다.
누구맘대로 다른 이의 삶을 응원하고 말고 하냐,
그저 자기 자신을 향하여 박수도 환호도 열심히 할 줄 아는 자들이
자존감싸움에서 이긴 것이라고 그 응원만이 진심이라고 삐죽거리며 주정하곤했다.
일년이 넘었다.
사내가 건네주는 원고지, 이 희귀한 원고지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비좁아보이는 원고지칸칸들을 들여다본다.
도무지 채워질만한 글자들은 없고 옥수수같기도 하고 짐승이 가진 치아같기도 해서
두려워지기도 한다.
여자는 그 칸칸들이 정다워질 날을 기다린다.
혹은 사내가 발길 혹은 손길을 끊을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덜컥, 불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