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운 것이 아니라 함께 버틴 시간

by 지니


질병은 어느 날 갑자기 삶 안으로 들어왔다.
준비할 시간도, 이해할 시간도 없이
우리는 그 시간을 함께 살게 됐다.

처음에는 싸운다고 생각했다.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고
나아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더 애썼고
더 긴장했고
더 버티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는 조금씩 알게 됐다.

이건 싸움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것을.

좋아졌다가 다시 나빠지고
괜찮은 날이 있다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이 이어졌다.

그 시간은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느렸고
조용했고
길었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예전의 일상,
당연했던 계획,
미루지 않아도 됐던 일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잃은 것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기다리는 법을 배웠고
속도를 낮추는 법을 배웠고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는 법을 배웠다.

질병은 삶을 멈추게 하지 않았다.
대신 삶의 속도를 바꿨다.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은 미뤄도 되는지
무엇은 끝까지 지켜야 하는지
조금씩 알게 했다.

돌봄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크게 해낸 날보다
아무 일 없이 지나간 날이 더 많았다.

같이 앉아 있는 시간,
같은 이야기를 다시 듣는 시간,
괜찮다고 말해주는 시간.

그 반복 속에서
나는 버틴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다.

누군가를 돌보는 일은
강해지는 일이 아니라
부드러워지는 일이었다.

예전의 나는 해결하려고 했고
지금의 나는 함께 있으려고 한다.

질병은 많은 것을 바꾸었지만
사람을 보는 방식도 바꾸었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더 오래 듣는다.
답보다 이해를 먼저 생각한다.

10년이 넘는 시간은
우리에게 특별한 결론을 주지 않았다.
대신 하나의 태도를 남겼다.

싸운 것이 아니라
함께 버틴 시간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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