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기가 성취로 이어지지 않아도

by 박작가

코로나 4단계로 아이가 원격수업을 할 때였다. 여느 날처럼 아이가 방문을 닫고 들어가자 나 역시 언제나 해오던 그날 치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잡고 있던 펜을 놓고, 내가 이 같은 시간을 몇 년째 해오는지 세어 보았다.


한자를 알면 소설 읽을 때 뜻을 찾는 수고를 줄일 수 있겠구나 느끼고 혼자 설렁설렁 한자 공부를 시작한 건 아마도 방통대 공부 중이던 24살. 책 살 돈도 아까워 인터넷에 있는 8급부터 1급까지 한자를 손으로 모조리 베껴 쓴 노트가 메인 사진 속 분홍 집게로 묶인 거다. 부족하다 느낀 공부는 하고 싶은데 학비는 없고, 학자금 대출도 안돼 들어간 방통대는 생각보다 고되어, 여유로운 대신 한 달에 60만 원 버는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였으니 나에게는 그 수고가 당연했다. 아무튼 그때는 하루에 스무 자씩 외우고 쓰던 걸, 가정주부가 된 지금은 일주일에 고작 하루, 다섯 자 씩만 보고 있지만 나는 지금껏 저 노트를 세 번쯤 쓰고, 외고 있다. 물론 안 한 것보다야 낫긴 하나 타고난 머리가 썩 좋지 않은 치라 계속 까먹는다. 다행히도 난 그런 사실에는 크게 개의치 않는 편이라는 것.

스페인어 공부도 마찬가지다. 스페인에 두 번째로 다녀온 뒤 스페인어가 너무 하고 싶어진 나는, 남편이 사준 기초 문법책을 다섯 번째 읽고 있다. 영어 학원 다닐 돈이 없어서 당시 유학 중이던 남편이 알려준 방법대로 <그래머 인 유즈>를 다섯 번 읽었던 게 꽤 효과가 커서, 스페인어도 그렇게 하면 되겠거니 생각하고 시작한 거다. 하지만 최소 6년은 주입식으로라도 학교에서 공부를 했던 영어에 비해 스페인어는 생판 모르는 언어라서 그런지(나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기초에서 그다음으로 잘 넘어가지지 않는다. 스페인어는 나름 40세까지 더듬거리더라도 말해볼 만큼은 공부하자는 목표를 세웠던 터라 그 나이가 일 년 남은 지금 내 실력이 살짝 아쉽지만, 그것도 안되면 안 되는대로 받아들이자는 생각이다.


이것들 말고도 내 생활 속에 십수 년째 이어져오고 있는 습관 같은 게 여럿 있다. 그리고 남편을 비롯해 나와 가까운 사람들은 내 그런 성정을 ‘끈기’라는 좋은 말로 칭찬 해주곤 한다. 사실 나는 남편과 살기 전까지만 해도 이런 나의 습관을 특별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나로서는 갖고 태어난 성격 같은 거라 당연한 걸지도. 어쨌든 특별하다는 생각 대신 눈에 보이는 성취나 확실한 성과를 내는 사람들에 비해 내가 가진 이 끈기가 별 볼 일 없게 느껴질 때가 사실 더 많다. 심지어 최근에 나는 남편과 친구들에게 장난스레 이런 말까지 했다. 내가 마치 허생전 속 허생 같다고. 돈도 벌리지 않는 일에 십수 년 간 노력과 시간을 쏟아붓는 모습이 말이다.


사람이 만족을 느끼는 건 자신이 이룬 성취를 통해서라는데, 아마도 눈에 띄는 성취랄 게 없기 때문에 가끔 나 스스로 깎아내리게 되는 것 같다. 끈기라는 단어에 ‘긴 시간’이라는 어감이 담긴 것처럼, 나는 느리게 나의 길을 쌓아가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길 어딘가에 우리가 ‘성취’라는 말에 떠올리는 무언가가 있을지, 없을지 나는 확신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날 습관처럼 공부를 하던 중 사진까지 찍으며 순간을 기록해둔 이유는, 하루하루 내게 주어진 시간을 성실하고 기쁘게 쓴 것도 성취로 생각하자는 혼자만의 다짐 같은 거였다.


오늘도 내 자리를 잘 지킨 나를 칭찬하며 살 필요가 있다는 생각.

우리 모두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