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라는 관계

by 박작가

최근 몇 년간 나와 가장 가까운 어른이자 친구처럼 지내온 사람이 있다. 대체로 혼자 있거나 무리 사이에 한 명으로 살아온 터라 단짝이라고 부를만한 친구를 가져본 적 없었던 내게, 그분은 처음으로 '단짝' 같은 존재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나는 전에 없던 관계 안에서 수년간 많은 걸 채움 받는 시간을 보냈다.


상처 없는 사람이 없듯 그분 역시 상처가 많은 사람인데, 내가 본 그 누구보다 그 상처를 잘 극복해 밝게 살며 물리적으로도 꽤 성공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분의 인생 여정을 들을 때마다 나는 항상 가슴이 짠했다. 오히려 당사자인 그분은 나처럼 감성적이지 않고 이성적인 사람이라 본인 이야기에 울먹이는 일조차 없었지만, 나는 결과보다 그 과정 속에 그분이 참아왔을 마음들에 더욱 시선이 향했다. 예컨대 성공한 사람들 옆에 못된 욕심을 갖고 달려드는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 부모에게 사랑이 아닌 학대를 받으며 자라온 유년기 등. 결국 자신을 지키기 위해 늘 방어벽을 치고 자기만의 세상 안에서 답을 찾아 이겨내 온 시간들에 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분에게 있는 상처가 결국 나에게도 영향을 주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아무리 친구처럼 격 없이 지낸다고 하지만 그분이 나보다 어른이라는 사실이 주는 위계질서가 없을 수 없었고, 옳고 그름에 대해서 감정적인 부분까지도 대부분 그분에 의해 결정될 때가 많았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상대에게 위로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느끼면 곧바로 감정이입부터 하게 되는 나는 나도 모르게 목소리 톤부터 바뀌며 위로의 말들을 하게 되는데, 그분은 나의 그런 반응을 굉장히 불편해했다. 불편해할 뿐만 아니라 내게 '그러지 마라' 단호하게 말했다. 자신은 힘내라는 말 한 마디면 되는데, 내가 자신을 너무 힘든 일이 있는 사람처럼 대하는 게 싫다는 게 이유였다. 처음에 나는 그분의 이 같은 반응에 많이 당황했다. 여태껏 수많은 위로를 건네며 고맙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그렇게 말하지 마라’는 반응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나는 그분이 나와 '다른' 성격이라 그럴 수 있겠다 생각하고 이런 반응을 몇 번 넘겼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나는 그분과의 대화가 전반적으로 불편해졌다. 내 모든 방식이 부정당하는 기분 때문. 감정조차도 말이다. 또한 관계 안에서 내가 계산하지 않는 부분을 그분은 계산하는 걸 몇 번 느꼈는데, 자기 방식에서 벗어나는 순간 내 마음보다 그 방식에 서운함을 느끼며 나를 밀어내는 걸 나는 몇 번 경험했다. 아무리 가깝게 지낸다 해도 한 사람을 다 알 수 없지만, 추측컨대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들 때문인 것 같아 나는 이런 그분의 방식 역시 인정해 보려고 노력했다.


이렇듯 내가 그분을 이해해보려고 애를 쓴 이유는 여행을 하면서 가장 많이 생각했던 것, 즉 다름과 틀림의 차이 때문이었다. 다양함 속에 자주 노출되다 보면 내가 옳다고 느꼈던 게 다양한 선택지 속 하나일 수 있다는 걸 깨닫고 고개가 수그러질 때가 많다. 그래서 나는 여행이 거듭될 때마다 사람들의 생각이나 태도에 대해서도 다름을 인정하는 태도를 견지하자는 다짐을 수없이 해왔다. 그런데 내가 그분 안에서 느낀 건, 내가 그분의 생각과 태도를 존중해주는 것만큼 그분에게 내가 존중받고 있지 않다는 거였다. 또한 마음을 많이 내어준 사람에게서 여러 번 밀어냄을 당하니 내게 상처도 쌓인 것 같다. 이런 기분이 반복되자 나는 그분과의 만남이 점점 괴로워졌다.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 데 대한 원망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거다.


당연한 수순대로 원망은 내게 분노의 감정을 일으켰다. 왜 엄마를 비롯해 내 주변에 있는 어른들은 모두 자기가 가장 힘들고 아플까? 왜 자신과 다름을 보지 않고, 틀렸다고 말할까? 자기가 받은 상처를 가여워하면서 왜 비슷한 상처를 상대에게 주고 있다는 걸 보지 못할까? 그리고 나는 왜 그 옆에 있다는 이유로 계속 상처를 받아야만 할까? 이런 원망들이 쌓이자 나는 요즘 전에 없던 생각을 하게 됐다. 다들 이기적으로 사니 나도 나만, 내 식구들만 생각하고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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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만 세게 했을 뿐 정작 내 마음은 온갖 생각으로 어지러웠다. 그분 말마따나 생각이 ‘너무’ 많은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생각들과 맞짱을 뜨니까. 그래서 종종 몸도 아프고 악몽을 꿀 정도인데, 그런 시간에도 다행히 끝이라는 게 온다. 게다가 나는 그 끝에서 긍정적인 걸 하나 발견했다. 내가 바닥을 치며 살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되는 ‘사람들’이 보인 거다. 주변 친구들이나 남편이 종종 내게 인복이 많다는 말을 하는데, 인맥이 넓은 편은 아니지만 그들 말대로 나와 가까운 사람들 대부분은 내 모습 그대로 인정해주며 따뜻하게 나를 보듬어 준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내가 이처럼 어려운 마음일 때 생긴 내 삐딱한 생각을 많이 상쇄시켜준다. 예컨대 이런 말을 듣고 성급하게 일반화하지 않도록 말이다.


"너 아프다는 얘기 어디 가서 너무 자주 하지 마. 사람들은 그런 얘기 듣기 싫어해."


이 말을 듣기 전 나는, 눈치가 워낙 빠르고 싹싹한 그분이 몸이 시원치 않은 상황에서도 나이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인 어떤 모임에서 막내 노릇을 하느라 힘들 것 같다는 말을 했던 터였다. 그런데 걱정 섞인 내 말에 돌아온 그분의 이 말을 듣고 나는 사실 어안이 벙벙했다. 물론 취미를 공유하는 모임의 특성상, 그리고 그분 말대로 그렇지 않아도 몸 여기저기가 아픈데 자신들보다 어린 사람에게 아프다는 말을 듣는 걸 싫어할 순 있지만, 가까운 사람에게 아프다는 말조차 하면 안 되나. 그리고 당연한 순서대로 나는 그분에게 아프다는 말은 하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미 서로 어긋나는듯한 대화가 몇 번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대화 이후 찜찜한 기분이 쉬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분을 이해해보기 위해 생각한 바, 누군가에게 기댈 수 없이 살아온 그분으로서는 아픔을 이야기하는 건 '나눈다’라기보다 '징징대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동시에 내게는, 내가 아프다고 말하면 마치 자기 몸이 아픈 듯 위로해주며 며칠이고 안부를 물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분에게는 지금까지 진득하게 자길 지켜주었던 존재가 없었기 때문에 위로를 받기보다 밀어내는 것일지도. 그래서 자기를 지키기 위해 만든 방어벽을 두른 채 위로를 기대하지 않고 이겨내며 살아온 것 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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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그분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던 중에 나는 코로나로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한 언니들과 만났다. 오랜만에 만난 터라 신나게 그간 못 나누었던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갑자기 한 언니가 선물 꾸러미를 꺼냈다. 언니는 본인 생일 선물로 자신을 포함해 그 모임에 있는 모두를 위한 팔찌를 샀다며 정말이지 행복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선물을 전했다. 본인만을 위해서는 그 선물을 살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을 위한 선물이라면 살 수 있을 것 같았단다. 그러면서 언니는 올해 우리 생일 선물은 이걸로 다 주고받은 거라며, 과장을 좀 보태자면 세상 다 가진 듯 행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순간 내 머릿속에는 언니의 말과 그분의 말이 오버랩되면서 가슴 한편이 씁쓸해졌다. 내가 더불어 살아온 마음에 대해 자랑스럽다는 생각과 그분의 날카로운 말들이 대비되어 떠오른 거다. 내가 여전히 모자란 탓이겠지만, 그 아픔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아직 힘들다는 마음. 결국 내 아픔을 드러내면 싫어할 게 뻔하니 숨겨야 하나 고민하게 만드는 그분과의 관계가 어렵다는 생각이 나로 하여금 그분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


우리라는 관계가 힘든 사람과 '우리'로 사는 게 가능할까? 결국 ‘우리’는 각자가 서로를 향한 존중과 신뢰를 바탕으로 지탱되는 관계일 텐데 그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한 사람과는 어쩐지 자신이 없다. 지금의 나로서는 삶이 언젠가 내게 그와 같은 관계의 줄을 잘 탈 수 있는 지혜를 실어 주리라 믿어보는 수밖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