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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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을 앞둔 지난밤, 오랜만에 나는 밤잠을 설쳤다.
산행이 처음은 아니지만 인도자 또는 동행 없이 혼자 산을 오르는 것은 처음이니 머릿속에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여하튼 새벽 5시 알람 소리에 눈을 번쩍 뜨고 거하게 아침상을 차려 먹은 뒤, 나는 선크림만 대충 바르고 화개행 버스를 타기 위해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간밤의 푸르름이 남아있는 새벽에 지하철을 타러 가는 게 생각해보니 무척 오랜만이었다. 새벽 지하철 안에서 늘 그렇듯 힘없는 목이 여기저기서 삐걱거리고 있었다. 나는 곧 그 대열에 합류했다.
아직 워홀러와 배낭여행자 티를 벗어내지 못한 나는 예산을 타이트하게 잡았는데, 버스터미널까지 가는 길에 이미 멀미가 시작된 탓에 큰맘 먹고 음료수를 하나 사 먹었다. 미리 끊어둔 버스표를 찾고 버스 밖에서 미적대는 기사 아저씨보다 먼저 버스에 오른 나는 그대로 잠이 들어, 가는 길 내내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화개 역에 도착해 인적이 드문 분위기를 보니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지리산 홈페이지에 나온 대로 갔다가는 산중 미아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애초에 가려고 했던 길이 아닌 의신길로 마음을 바꾸었다. 하지만 입구에 들어서 보니 조용하고 인적이 드문, 아니 없는 건 이곳도 마찬가지. 하지만 이미 입구에 들어섰으니 어쩌겠나. 하릴없이 조용한 산을 본격적으로 걷는데 처음엔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게 나뿐이라 왠지 경쾌한 느낌이 들어 좋았다. 그런데 두어 시간쯤 한 사람도 보지 못하자 다시 두려움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산을 오르는 사람이 이렇게 한 명도 없을 수 있나 싶었다. 의심은 불안을 낳을 뿐 좋은 게 없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고요하다 못해 적막한 산에 소리라도 만들어 볼 양으로 노래를 부르거나, 산 밖에서 쌓였던 화를 쏟아내기도 했다. 어느 정도 산 속이라 부를만한 곳에 들어왔을 때부터 파리 몇 마리가 내 주위를 돌기 시작했는데, 친구들까지 그러모았는지 금세 수십여 마리 파리 집단이 내 주변을 알짱대기 시작했다. 처음엔 귀찮아 손을 휘휘 젓다가, ‘이것들이 죽을 게 두려워 알짱대지 않으면 사람이게?’하는 생각이 들어 까짓 거 동행하자고 마음을 바꾸었다. 비록 윙윙 소리가 멀미를 유발했지만, 사람 한 명 만나지 못하는 산 길 위에 내 불안을 잠재워줄 유일한 생명체들이었으니까.
이 날 산에서 가장 크게 들려온 건 새소리였다. 몇 시간쯤 듣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음의 형태로 들리기 시작하는데, 순간 내가 몹시 문명화된 인간이라는 걸 깨달았다. 요컨대 새소리 자체로 듣는 게 아니라 라디오에서 자주 들어온 정각 알림 소리처럼 들려온 탓이다. 새소리가 먼저인데 나는 새소리를 따서 쓰는 라디오를 먼저 떠올리는 문명인이구나, 하면서.
그렇게 생각들을 이어가며 또 두어 시간은 그럭저럭 걸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뒤로 세 시간 반은 정말이지 고됨의 연속이었다. 명확하게 보이던 길이 몇 번이나 흐릿해져 등산 초보자인 나는 한 번씩 길을 잃었고, 갈래길에서 확신이 아닌 감을 의지해 길을 선택했다가 나무들 사이에 말 그대로 온몸이 걸리기까지 했다. 나뭇가지에 걸려 움직이지 못한 그 짧은 순간에 나는 지리산 반달곰 생각, 아직 반도 오르지 못했다는 현실 같은 게 떠올라 진심으로 울먹였다. 설상가상으로 회색빛이던 하늘은 결국 비까지 쏟아내기 시작. 지난봄 스페인과 포르투갈, 도쿄 여행에 이어 하필 비가 오는 초여름날 산행을 하게 되다니, 2010년 나는 비를 모는 여자라는 소임이 맡겨진 게 분명하다. 나뭇가지에 걸린 몸뚱이를 겨우 빼내고부터는 몸도 마음도 무기력해져 걸음이 느려졌고, 혹시 쓰러지면 어쩌나 걱정되는 마음에 나는 터지지도 않는 전화기만 몇 번을 꺼내 봤는지 모른다.
그래도 마음 저 끝 어딘가에 있던 힘 하나가 나를 계속 걷게 해 주었다. 학창 시절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때 나를 버티게 해 주었던 생각, 즉 ‘모든 일에는 끝이 있다는’는 것이 말이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오르막에 수십 번쯤 속았다고 투덜대다 드디어 내 눈앞에 이 날의 목적지인 대피소가 보였다. 그러자 장장 8시간을 견디던 몸은 빠르게 힘을 놓기 시작했고, 예약해둔 대피소 직원에게 모포를 받아 들고 자리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쓰러지듯 누웠다. 그렇게 눕자마자 딱 한 가지 생각만 하고 나는 곧장 깊은 잠에 빠졌다. 다음 날은 산이 부디 나를 살살 다뤄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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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누워 나는 한 번도 깨지 않고 열한 시간 반을 자고 일어났다. 일어나서 개운해진 몸을 느끼며 나는 전 날 내가 탈진 상태였다는 걸 깨달았다. 아직은 젊었던지 그렇게 자고 일어나 회복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유리창 밖에서부터 대피소 깊숙이 들어오는 햇빛을 보며 나는 반사적으로 아침에 먹기 위해 가져온 통조림, 과일 등을 꺼내 식사를 했다. 몸에 힘이 좀 생기니 오늘 오를 산의 정상이 기대되기까지 했다.
나는 전날과 달리 오르는 게 무척 수월하다고 느낌과 동시에 전날 걸었던 길이 떠올라 정신이 아찔해졌다. 내가 도착하자 만난 대피소 직원이 너무 지친 몰골인 내게 어느 길로 올랐냐 묻길래 의신길로 올랐다 했더니, 그는 그 길이 3년간 거의 사람이 오르지 않은 길이라고 했다. 길 없는 산을 올랐으니 초보인 내게 힘들었을 수밖에. 무사히 대피소를 찾은 것만도 천운이었던 게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전날 그토록 어려운 길을 걸었더니 정상까지 가는 길은 너무 쉽게 느껴질 정도로 가뿐했다. 그래서 몇몇 장정분들의 걸음까지 몇 번이나 재쳤는데, 그 와중에도 나는 사방을 둘러싼 절경을 아쉽지 않게 눈에 담았다. 명불허전, 지리산은 참으로 멋진 산이었다.
정상에 다 닿아갈 때쯤, 나는 오르는 길에 몇 번이나 마주쳤던 한 청년과 말을 트게 됐다. 알고 보니 동갑내기. 이후부터 나는 전날과 너무 비교되는 수다스러운 산행을 하게 됐다. 덕분에 가는 길과 정상에서 몇 차례 사진까지 얻어 찍었다. 드디어 정상에 올랐을 땐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던 아침과 달리 정상 바로 밑으로 구름이 좀 껴 있었는데 어떤 아저씨 왈, “누가 왔길래 산에 이렇게 구름이 몰려와?”라는 말에 순간 뜨끔. 나는 아무도 모르게 저요, 소리를 내고 피식 웃으며 작은 가방 하나씩 매고 오르신 60, 70세 이상 되는 할머니들의 정상 탈환 기념 춤사위를 감상했다. 무려 지리산 정상에 올라 구름이 발아래에서 걷혀가는 모습을 보니 내내 아래만 있던 내 처지가 생각나 ‘감히’ 내가 이 풍경을 내려다봐도 되는가 싶었다. 그리고 묘하게 성취감이 몰려왔다. 정상에서 맞는 바람은 그 어느 곳에서 느꼈던 것보다 시원했다. 아, 이 맛에 산행을 하는구나.
내려오면서 나는 다시 생각했다. 산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곳이라고. 마음이 조금만 산보다 높아지면 금세 산에게 혼줄이 난다. 인생을 집약적으로 살피기에, 인생에 필요한 태도를 배우기에 산만큼 좋은 곳이 있을까 싶은 정도다.
오르면서 만난 동갑내기 청년은 내 발걸음에 대해 사부작사부작, 순발력, 지구력 따위의 평가를 내려주었다. 건강하게 산행을 하고 칭찬까지 잔뜩 받은 나는 하산도 기분 좋게, 예상보다 빨리 마쳤다. 마침내 중산리 출구를 빠져나오며 지리산 종주를 끝냈을 때의 행복이란! 정말이지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등산보다 굴곡이 심한 ‘인생’을 종주했을 때, 나는 어떤 마음으로 그 끝에 서게 될까 궁금해진다. 결혼이라는 인생의 큰 사건을 앞에 두고 내 인생 중 가장 공식적이고 광범위한 논의를 벌이고 있는 지금, 그 삶의 끝이라는 게 갑자기 앞으로 확 당겨 상상된다. 인내해야 할 그 길이 한참 길고 막막하게 느껴진다.
돌아오는 길 가방과 팔다리는 갈 때보다 더욱 무거워졌고, 서울이 참 시끄럽다는 걸 깨달으며 귀와 마음이 함께 정신없어졌다. 그리고 산속에서 간간이 들려온 새소리와 바람결에 흔들리던 풀소리가 그리 크게 들릴 수 있었던 것은, 산속이 간직한 묵직한 고요 덕분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고요함 속에서만이 아름답고 맑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 그러므로 앞으로 다가올 지난한 삶의 굴곡 속에서도 고요한 시간만큼은 꼭 가지며 살아야겠다는 다짐. 그리하여 소음과 소란에 나를, 내 중심을 잃지 않는 인생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