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방콕
한 달에 60만 원 버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하고 학자금 대출을 갚으며 살던 이십 대 중반. 나는 그중에 매달 10만 원씩은 꼭 여행비로 떼어 저축해 두었고, 일 년에 두 번 배낭을 메고 여행을 떠났다. 그렇게 그 해 두 번째 여행을 방콕으로 정해두고 드디어 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하필 환절기와 바쁜 일정 등이 겹쳐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약간 속이 상하긴 했지만 몸과 다르게 변수가 없는 시간은 정확하게 내가 기대해 마지않던 날로 나를 데려와 주었으니, 나는 몸이 최대한 힘을 내주기를 바라며 출발하는 날을 맞았다.
여행 당일 나는 작은 여행사의 유일한 직원이자 아르바이트 생으로서 마무리 지어야 할 중요한 업무를 위해 8.1Kg의 배낭과 필름 카메라 그리고 갈색 싸구려 크로스 가방을 메고 사무실에 들렀다. 그리고 삼십 분 후 나는 드디어 내 여행에 진입할 수 있었다. 일 년 전부터 계획한 여행이니 들뜰 법도 한데 막상 여정에 들어서니 감기 기운에 졸리기만 했다.
공항버스 창밖으로 드디어 인천공항이 보이자 여행이 조금 실감 났는데, 공항에서 사장님으로부터 급히 마무리 지어야 할 일 한 가지를 더 전달받아 해결하고 부탁받은 면세품 구매까지 하느라 한차례 또 진을 뺐더니 나는 보딩 전 의자에 앉자마자 또 졸았다. 2주간의 여행에 몸이 제 역할을 해낼지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역시 비행기가 나에게 약이었나 보다. 여행 비수기이기는 했지만 내 좌석 양 옆으로 자리가 비어 누워갈 수 있었던 데다, 남들은 맛없다고 욕하는 기내식을 좋아하는 나는 기내식 먹을 생각에 들뜨기까지 했다. 비행기에 타기 전까지만 해도 몸이 무겁고 졸리더니 잠은커녕 구름 한 점 없는 창밖을 바라보는 내내 개운한 기분이 느껴졌을 정도다. 그날 저녁 하늘은 마치 구름 없이 하늘 위를 나는 기분이 들만큼 맑았다.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수많은 여행객들로 24시간, 365일 내내 복잡하기로 유명한 수안나 폼 공항은 예상보다 한가했다. 그래서 빠르게 배낭을 찾고 카오산 로드로 가는 AE2 버스를 기다리며 앉아 있는데, 나는 혼자라서 덜 심심하다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또한 당연히 내가 모든 걸 결정하고 해결해야 하니 귀찮다는 마음이 아예 없다는 생각도. 해외여행을 혼자 떠나본 게 처음이라 그전에 없던 새로운 생각들이 밀려든 게다. 아마도 그 순간부터 나는 여행이 시작되었다는 흥분을 제대로 느끼기 시작했던 것 같다. 비행기라는 약이 잠시 눌러준 몸살 기운은 버스 자리에 앉자마자 되돌아와 정신없이 졸았지만 아무렴.
그리고 그렇게 뜬금없이 카오산에 도착했다. 수없이 상상했던 거리에 내리던 그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던 그때의 기분은 14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정말, 여행자들 천지구나!"
나는 혼자 작은 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그 소음 속에서 나는 신이 났다. 카오산에 있는 모두가 각자 그곳에서의 자기 자신을 누리고 있으니 나의 존재는 아무것도 아닌 듯 느껴졌는데, 그래서 오히려 그곳에서의 나는 특별하다는 낯선 기분. 혼자라서 적막하던 이 날 하루가 갑자기 시끌벅적해졌다.
분위기에 홀려 입을 벌린 채 카오산 로드를 걷다가 문득 시간이 너무 늦었다는 생각에 나는 미리 생각해 두었던 게스트 하우스를 찾아갔다. 그 게스트 하우스는 가성비가 좋은 대신 사전 예약을 받지 않는 곳이라 빈 방이 있을 경우 남아 있는 방들 중 하나를 택해 묵을 수 있었다. 다행히 그날 남은 방이 있었고 나는 화장실은 공용이지만 룸은 따로에 싱글 침대가 두 개나 있는 쾌적하고 넓은 방을 배정받았다. 만원 남짓한 돈을 내고 침대가 두 개인 방에 들어서니 나는 갑자기 내 여행이 호화스럽게 느껴졌다. 마음 같아서는 침대 두 개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누리고 싶었지만 긴 여정에 지친 나는 이후 일정에 무리가 없도록 일찍 자는 쪽을 택했다. 이번에 내 여행 모토는 빈둥대는 배낭 여행자로 해야지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