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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Road Movie 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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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작가 Oct 25. 2022

혼자 걷기

2008. 치앙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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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몸이 찌뿌듯하다.

 충분히 자고 싶어 아홉 시에 알람을 맞춰 두었는데 여덟 시에 깨버렸다. 눈 뜨자마자 허기를 느끼는 나는 Y언니가 전날 주고 간 옥수수와 바나나, 아빠가 협찬해 주신 빵으로 아침을 먹고 천천히 나갈 준비를 했다.



 트래킹 하고 내려오면서 젖은 옷을 전날 빨아두고 잤지만 습한 날씨 때문에 마르지 않아, 군데군데 빳빳해진 옷들 중 대충 골라 입었다. 뜨거운 거리를 걷다 보면 마르겠지. 옷을 입고 곧장 로비로 내려온 나는 공용 컴퓨터가 보여 무의식적으로 앉아 인터넷 창을 열었는데, 그 속에 잠깐 들어간 것만으로 내가 지금 치앙마이가 아닌 한국에 있는 느낌이 들어 급히 창을 닫았다. 그리고 그제야 ‘오늘 뭘 하지?’라는 생각에 닿았다. 해야만 하는 것들을 많이 생각하고 여행하는 편이 아니라 예약해 둔 일정 외엔 정해온 게 없었던 거다. 나는 일단 숙소에 놓인 무료 지도를 하나 들고 거리로 나섰다. 구글맵을 당연하게 쓰는 지금 생각하니 14년 전 나는 이렇게 여행을 했구나, 격세지감을 느낀다. 


 아무튼 방향만 생각해 두고 무작정 썽태우를 잡아 탔는데, 손님은 여기에서도 나뿐. 나는 사람을 물리치며 다니는 치인가, 하는 우스운 생각을 해보았다. 썽태우에서 내린 나는 쁘라뚜 타패를 시작으로 장장 5시간을 걸었다. 문득 보인 로컬 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먹었던 20분을 빼고는 내가 생각해도 참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걸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시내 동서남북에 있는 4개의 문 중 3개 문을 본 게 기억났다. 뭘 본 건가 지도를 확인해 보니 이 날 나는 해자와 성벽 주변을 제대로 한 바퀴 돈 모양이다. 지도를 보고 걸은 게 아니라, 걷고 나서 지도를 봤더니 마치 내가 치앙마이를 스스로 알아낸 기분이 들었다. 싸구려 슬리퍼를 신고 그만큼 걸었더니 발바닥은 아파 죽겠지만 개척자가 된듯한 그 기분이 나는 좋았다. 


 점심은 걷다가 허기가 느껴졌을 때 바로 눈앞에 있던 식당으로 들어가 해결했다. 알아볼 수 없는 태국말만 가득한 메뉴판에서 나는 가격만 확인한 후 가장 저렴한 1번 메뉴를 골랐다. 지금도 그때 내가 먹은 게 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태국에서 먹은 음식들 중 향신료 맛이 가장 강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팍치라 불리는 고수를 이 날 처음 '알아보고' 먹었으므로. 사실 나는 도대체 고수가 뭐길래 만나는 여행자들마다 고수 괜찮냐 묻는지 싶었을 정도로, 처음 먹는 고수가 낯설거나 싫지 않았다. 그냥 이 나라 사람들이 땅콩 갈아서 넣어 먹는 걸 좋아한다는 생각만 했다. 돌이켜보니 내가 이토록 입맛이 까다롭지 않은 사람이라 이만큼 세상을 돌아다닐 수 있었구나 싶다.


 걷고 또 걸으며 이 날 나는 참 많은 생각을 한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즐거움을 느꼈다. 처음 혼자 떠난 여행에서 나는 그 즐거움을 알아간 거다. 그래서 아픈 줄도 모르고 그리 걸었을까. 생각을 했을 뿐인데 나는 가슴이 시원해지는 걸 느꼈다. 오롯이 나와 만나는, 마주한 나를 위로해 주거나 독려해 주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걷다 눈에 익은 동네다 싶어 보니 건너편에 게스트 하우스가 보였다. 이 날 밤 다시 야간 버스를 타야 했으므로 나는 게스트하우스가 아닌 그 옆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 쉬기로 했다. 가난한 여행자에게 밥값에 버금가는 티 한 잔은 사치였지만, 야간 버스 타고 고된 밤을 보내야 하는 나에게 이 정도 보상은 필요하다 생각하며 나는 타이 티 라테 한 잔을 주문해 마셨다. 주황빛의 태국식 밀크티는 내가 평소에 즐겨 먹던 밀크티에 비해 훨씬 달았는데, 거의 여덟 시간을 걷느라 피곤했던 내 몸에 말 그대로 단비 같이 느껴졌다.


 2박 3일이라는 짧은 시간 머무른 탓에 치앙마이를 떠나는 게 나는 너무 아쉬웠다. 그리고 14년 전에 내가 본 치앙마이는 무척 깨끗한 도시로 기억된다. 거리의 풍경뿐 아니라 분위기도 과거와 현재가 깨끗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느꼈다. 특히 수십 년 전 내가 뛰어다니던 골목의 풍경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며 골목 사이를 걸었더니, 이 도시에 더 빨리 친숙해진 기분이었다. 나는 올 때보다 훨씬 더 길게 느껴지던 방콕행 야간 버스 안에서 언젠가 꼭 이 도시를 천천히 느끼러 오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11년 뒤 나는 나의 다짐을 이행했고, 11년 전에 끼적인 이 일기장을 펼쳐 보고서 알았다. 11년 전의 나와 너무나도 같은 소감과, 같은 걸음을 걸었노라고. 하여 그런 기록을 남길 수 있게 해 준 치앙마이가 지금 나에게는 더욱 특별한 도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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