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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작가 Jan 16. 2024

너와 함께라면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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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말하기도 민망하지만 이번에도 나는 어쩌다 보니 공항에 와 있는 심정으로 출국의 순간을 맞았다. 엄마와 환갑 기념으로 발리에 다녀오고 한 달 여만에 또 공항을 온 데다, 발리 여행 전후로 내 삶을 지배한 한 사건에 감정이 휘몰아치듯 했던 터라 감흥이랄 게 끼어들 틈이 없기도 했다.


 나에게 이탈리아는 사실 좀 특별한 나라다. 스물두 살, 멘토로 여기던 분의 서재에서 책을 빌려 읽던 나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에 끌려 읽기 시작했고, 이후로 작가의 필력에 빠져 그녀가 쓴 책만 서른 권 가까이 읽어 오며 한 가지 다짐을 했다. 이탈리아만큼은 최소한 6개월간 여행할 게 아니면 가지 않겠다고. 그만큼 제대로 보고 싶고 밟고 싶은 땅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년 여름 뉴욕에서 그 생각이 바뀌게 된 계기가 있었다. 아이와 함께 센트럴 파크에 누워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나와 더 이상 긴 여행을 가지 않겠다고 하기 전에 짧게라도 이탈리아에 가야겠다고. 아이와 처음 그 땅을 밟으면 6개월이 아니라도 괜찮을 것 같다고 말이다.

 

 그런데, 나에게 그토록 특별한 꿈이었던 이탈리아 여행을 앞두고 나는 어느 때보다 어려운 상황을 뚫고 가야만 했다. 엄마에게 벌어진 일이 내 문제는 아니더라도 사건 자체가 너무 커 나는 공황이 다시 찾아왔을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터. 게다가 그렇지 않아도 내가 여행을 떠날 땐 어딘가에서 '꼭 여행을 떠나야만 하니'라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한데, 오랜만에 그 소리를 진짜 듣고 떠나야 했으니 설렘이 아니라 죄책감이 온통 가슴을 짓누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로 나는 20년 가까이 바라온 이탈리아행을 이렇듯 기대할 수 없는 마음으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여행이 가까워져 올수록 나는 기대할 수 없는 마음으로 떠나는 게 차라리 다행이다 싶어졌다. 스무 해 가까이 쌓아온 기대가 실제를 짓누르지 않기에는, 그리고 특정한 무언가를 바라기 보다 길이 보여주는 걸 보고 배울 수 있기에는 말이다.


 그렇게 다가온 출국날 아침.

 이탈리아 여행 정보를 며칠간 부랴부랴 찾아보니 이탈리아는 준비가 꽤나 필요한 여행지라는 걸 알게 된 나는, 너무 준비 없이 떠나는 것 같아 살짝 긴장이 됐다. 그러다 어느 순간 살수록 오리무중인 게 인생이라는 걸 깊이 깨닫고 떠나는 길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여행도 그와 같음을 알면 되리라, 주어지는 대로 걸으리라 다짐할 수 있었다.


 출발 시간이 한 시간쯤 지연되어 여유가 좀 생긴 나는, 엄마인 내게 이 여행이 왜 특별한지 아이에게 짧게나마 설명을 해주었다. 내 표정이 제법 진지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맙게도 아이는 지루할 법안 내 얘기를 끝까지 들어주었다. 물론 끝남과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자기가 좋아하는 게임 이야기를 이어갔지만 아무렴. 나는 드디어 내 아이와 첫 발을 디딘다는 조건을 붙여 그토록 바라왔던 이탈리아에 가는 거다!


 살수록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고, 버리고 낮아지지 않고서는 제대로 살아지지 않는다는 걸 그 어느 때보다 깊이 깨닫고 떠나는 걸음이다. 수천 년의 찬란한 역사도 결국엔 끝이 있었듯 우리의, 나의 삶도 끝이 있음을 알고 더더욱 겸허히 주어지는 것을 받아들이라는 배움을 얻고 그 땅을 보러 간다는 게 떠나는 길목에서야 납득이 간다. 나라는 사람이 이유를 알지 않고서는 살아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모든 게 이유를 알지 않고 섣불리 한 발짝도 떼지 못하게 하는 그분의 이끄심이라는 걸 깨닫고 나는 이번 여행을 시작한다.


 그러므로 더더욱 가볍게 걷기를. 완벽하고 알차게 누리려 애쓰지 않기를. 사십여 년의 내 생애를 거쳐 치열하게 배워오고 있는 것이 비움, 바로 그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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