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작가 놀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작가 Mar 07. 2024

쓰는 이의 삶

<나의 누수 일지> / 김신회

쓰는 삶은 나를 짧은 시간 들뜨게 하는 반면, 긴 시간을 비참하게 만든다. 쓰지 못해서, 써지지 않아서, 쓰고 나서도 먹고살기가 까마득해 틈만 나면 불안에 사로잡힌다. 그럼에도 다른 일을 할 엄두는 나지 않고, 딱히 잘하는 것도 없어서 그저 허벅지를 주먹질하며 책상 앞에 앉는다. 이게 답이 아니라는 건 알아. 그렇지만 이것밖에 없잖아. 그렇게 꾸역꾸역 글을 써도 제때 원고료나 인세를 받지 못할 때가 있다. 어쩌면 나는 밀린 돈을 받기 위해 이제껏 일해온 걸지도 모른다.

...이제는 고인이 된 미국의 극작가 로레인 핸스버리는 이렇게 말했다지.
"충분히 오만해야만 스스로 예술가라 여길 수 있다"고.'

평소에는 상관없지만, 예상 밖의 문제들이 발생할 때마다 '미숙한 나'가 나를 괴롭힌다. 이것도 모르고 저것도 모르고, 이것도 무섭고 저것도 두렵고. 당당히 1인분으로 살고 있다고 착각해온 시간이 나를 조롱한다. 너 이런 거 하나도 모르잖아. 이때까지 이런 것도 한번 안 해보고 뭐했어, 하면서.
 몰라도 되는 삶은 안락하다. 계획을 실천하며 살 수 있는 일상은 순조롭다. 그런 인생을 잘 굴러가게 한다고 해서 과연 어른일까. 지금껏 알던 세상이 무너졌을 때 잿더미를 털고 일어나, 몰랐던 걸 하나하나 깨치며 단단해지는 게 어른 아닐까.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보다 하지 못하는 일을 하려는 사람일수록 '통제'욕구가 강하다. 모든 것을 통제하겠다는 마음은 아이러니하게도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들에 더 집착하게 한다. 불행한 가족 이슈에서 해결사를 자처하며 희생양이 되거나, 잘 안 풀리는 연애나 인간관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거나, 실현 가능성 없는 일들에 사로잡혀 행동하지 않은 채 공상을 이어간다. 이들에게 현실은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내가 바뀌거나 남이 바뀌어야 달성되는 신기루 같은 것. 그들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란 어렵다. 심지어 자신조차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소설가 김영하는 말했다. "개인적으로 경계하는 것 중 하나는 정의감이 들 때예요. 이 정의감이 어디서 왔을까 알아봐야 해요." 그는 인터넷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르거나 글을 올리는 등, 간단하게 정의감을 실현하고 잊어버릴 수 있는 요즘 같은 시대야말로 정의에 관해 더욱 신중해질 때라고 지적했다. 어쩌면 나와 의견이 맞는 사람에게만 공감 능력을 발휘하면서 그걸 옳음 혹은 정의라 착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의 말이 정확히 나를 향했다.

지킬 게 있는 사람은 강해지는 것 같지만 오히려 연약해진다. 그리고 각박해진다. 행여나 더 큰 불이익을 볼까 봐 날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그게 과연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마음의 여유는 세상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온다.

나이가 들수록 이성적인 판단을 해야 할 것 같지만 오히려 반대다. 경험과 시간이 쌓일수록 직관을 따르는 게 뒤탈이 없다. '해야 할 것 같은 것'이 이성적인 판단이라면, '마음의 소리'는 직관적인 선택이다. 이성적인 판단의 기준이 '세상'이라면, 직관적인 선택의 기준은 '나'. 내가 이제껏 쌓아온 경험과 시간을 허투루 여기지 않는 일은 고집이나 뒤처짐이 아니다. 살면서 몸과 마음으로 만들어온 과학을 존중하는 것이다.

난데없는 소동으로 차근차근 망가지는 일상을 목도하면서, 우선순위를 잊고 허둥대는 나를 보았다. 옳은 길은 정해져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길이 내 길은 아닐 수 있다. 나의 선택이 누군가에게는 없어 보이고 겁쟁이 같고, 도망치는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나에게 맞는 걸 고르는 게 맞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중해야 할 것은 그럴듯해 보이는 해결책을 찾는 일이 아니라 나는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바로 보는 것이다.




사람은 다 존중받아 마땅하며 위아래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정작 나 자신은 늘 모든 이를 나보다 위로 둔 채 사는 게 나라는 사람의 오래 묵은 약점이었는데

고맙게도 연륜이 그걸 많이 상쇄해 주었다.


그래서인지 언젠가부터 어떤 얼굴을 보든, 

글 너머 어떤 사람을 상상하든,

그들과 그녀들을 직업인으로서 또는 포장된 누군가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보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새 모든 이를 나보다 나은 사람으로 보는 방식이 사라지고

요컨대 미사여구가 싹 빠진 글을 읽듯 사람을, 그리고 나를 보게 되었다.


글을 읽는 내내 이 작가는

그걸 나보다 앞서 깨닫고 해낸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무리 에세이라도 이렇게 솔직할 수 있을까 싶었으므로.

내 편에서 볼 땐 성공한 작가인 그녀가 작가보다는 한 사람으로서의 솔직한 고백들로 가득 찬 이 책이, 

그래서 나는 참 좋았다.


생각해 보면 나는 

도저히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차라리 나를 저 아래 끝까지 끌어내리는 말과 글을 썼던 것도 같다.

어쩌면 그 역시 위선 아니었을까 싶은 깨달음을 얻은 뒤로

나는 힘을 좀 빼고 마음을 가벼이 만들어 보려 노력하는 중이다.


둥둥 뜨지도, 축 가라앉지도 않은

나로서 글 쓰는 연습.

아니, 그전에 나로서 사는 연습.


나이 마흔에 깨달아 부끄럽다는 말도 핑계 대듯 하지 않으련다.

그게 나라는 사람이니.


그녀의 말처럼 쓰는 삶을 선택한 게 고되다 싶으나

또 그러지 않고서 살 수 없는 것이 '나'이니

그녀가 얻은 깨달음에 슬쩍 기대어 해결책이 아닌 나에 더욱 집중해 보련다.





매거진의 이전글 개인주의 시대에 관계를 이해하는 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