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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작가 May 23. 2024

가짜라고 외칠 용기

<가짜 노동> / 데니스 뇌르마르크&아네르스 포그 옌센

과거의 노동에 대해 살펴보면 한 가지 의미심장한 경향이 되풀이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군가 더 효율적으로 시간을 절약할 방법을 알아낼 때마다, 또 다른 누군가
는 그 시간을 사용할 새로운 방식을 알아낸다는 것이다.

...텅 빈 노동은...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있다. 스트레스는 할 일이 너무 많은 탓에 발생할 수도 있지만 심한 지루함, 보람의 결핍, 무의미한 타성으로도 유발된다. ... 스트레스의 축적은 자기 삶을 통제할 수 없다는 느낌과 더 관련 있다.

가짜 노동은 그냥 텅 빈 노동이 아니다. ... 아무 결과도 내지 못하는 작업이거나 마찬가지로 거의 결실을 보지 못하는 뭔가 다른 것이 계획, 제시, 착수, 실행되기 위해 사전에 이뤄져야 하는 노동을 지칭하기도 한다. 또한 뭔가 의미 있는 성과로 이어지길 바랐지만 그렇지 못한 노동도 지칭한다.

..지난 세기 무대 뒤 노동의 폭발적 증가, 특히 지난 50년간의 가속도가 가짜 노동의 완벽한 양육 환경을 조성했다. 그리고 이렇게 된 원인의 일부는, 무대 앞 노동을 먼 곳에서 들여온 값싼 인력과 자동화 기계에 위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 노동이 그 자체에 가짜 노동을 더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이는 매커니즘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킨슨의 법칙은..."일은 그것의 완수에 허용된 시간을 채우도록 늘어난다." ... 파킨슨은 관료제의 무한한 확장 능력에 대해 말한 것이다. 파킨슨의 법칙은 우리가 노동시간을 줄이지 못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돼준다.

조너선 거셔니에 의하면 옛 귀족이 신흥 부자로 대체되고 그들의 지위는 유전자보다는 인적자본, 즉 인간의 노동 능력을 기반으로 했다. 이전에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지위의 표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열심히 일하는 정도가 사회적 지위의 척도가 되었다. ... 바쁘다고 말하는 것은 나름 더 많은 일로 당신을 괴롭히면 안 된다고 남들에게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나한테는 이게 라이프스타일이 되었어요. 오히려 바쁘지 않으면 어찌할 바를 모르죠. 나한테는 바쁜 것과 직업적 보람이 본질적으로 연결돼 있어요. ... 이렇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우선순위를 정하는 능력을 잃어버렸고, '안 돼'라든지 '지금까지 만으로 충분하잖아. 더 이상은 필요 없어'라고 말하는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가짜 세상'에 살고 있어요. 고의적인 거짓말만이 문제가 아니에요. 노동의 허위적 본성을 포함한 세계의 허위적 본성 자체가 문제죠. 이때 필요한 건 진정성과 지적 명확성이죠. 우리는 인간의 삶에서 의미와 자율성을 극대화해야 합니다. 하지만 점점 줄어들죠."

...즉, 회의는 무의미한 안건과 동기 부여의 가장행렬이다. 종종 사람들이 냉혹하고 엄정한 시간과 돈의 가치에 부합하는 뭔가를 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개최된다. 다른 사람에게 관계없는 정보를 나누고, 자신이 얼마나 바빴는지를 증명하는 것이 회의가 가진 유일한 목적이다.

가짜 노동을 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되는 건 업무가 의미 있고 능숙해지는 상태까지 충분히 깊이 파고들 시간이 없기 때문일 수 있다. ...이런 방해는 시간이 남는 듯 보이는 동료로부터의 이메일, 회의, 전화에서 기인한다.

"...효율성은 발전의 방법이 될 수도 있지만 만능열쇠는 아닙니다. ...노동자에게 더 나은 삶의 질을 선사할 필요가 있어요. 삶에 의미가 있어야죠. 직장 생활만이 아니라 삶 전체에 있어서요."




어릴 때부터 '왜?'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하면 움직여지지 않는 사람이라

나는 모든 게 좀 더딘 편이다.


한 편으론 같은 이유로 답을 얻으면 직진.

속도가 난다는 게 아니라 그냥 꾸준히 간다.


그 삶이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게 된 건 결혼을 한 후부터다.

나와 정반대로 '일단' 열심히 사는 게 가능한 남편과 가족을 이루어 공동체로 살아가다 보니

이해되지 않는 여러 방식을 이해, 아니 인정하려고 노력해야만 공동체가 굴러가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어느새 14년 차,

나는 그 모든 걸 '이해'하려 들기보다

받아들이고 같이 걸어가는 법을,

방향이 같은 두 개의 길을 걸어가는 법을 어느 정도 익히고 살아가는 중이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언니에게 이 책을 읽고 요약해 말해주니 언니 왈,

우리가 그런 책 읽어 뭐 하느냐며 웃었다.


언니의 말처럼

사실 가짜 노동이라는 책을 읽고 가짜 노동을 멈추어야겠다 자극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남편일 텐데

내가 이런 류의 잘 정돈된 책을 읽고자 하는 이유가

어쩌면 확실한 이론을 발판 삼아

남편을 내 쪽으로 스윽 끌어당기고 싶은 저의가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책 제목에 끌린 첫 마음이 읽으면서도 내내 유지되어

몇 번쯤 속이 후련해졌다.

다만 신기한 것은 이런 종류의 주제를 상정하고 문제를 제기한 이들이

우리가 볼 때 가짜 노동 따위는 없으리라 생각되는 북유럽 사람들이라는 것.


이 주제에 이 나라가, 이 사회가

반향까지는 아니어도 들썩이기라도 좀 했으면.

우리 남편 좀 자주 보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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